글 싣는 순서
① 주저앉는 지역경제
② 번지는 불황의 불길
③‘무용지물’ 구조조정
④ 위기 극복의 길
⑤ 변신을 두려워 말라
자동차엔 약 3만개의 부품이 들어간다. 한국의 자동차산업에선 완성차 업체가 부품을 부탁하면 1~3차 협력업체가 이를 생산한다. ‘공급 사슬’ 구조다. 협력업체는 완성차 업체에 소속돼 안정된 공급망을 확보하고, 완성차 업체는 효율적 생산이 가능하다.
하지만 정점에 있는 회사가 흔들리면 문제가 생긴다. 최근 자동차산업 부진에 협력업체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는 이유다. 사슬 구조에 안주하는 것은 더 심각하다. 협력업체들이 10년 넘게 한 대기업에 묶이면 경쟁력을 잃게 된다. 전문가들은 제조업 위기의 근본 원인을 이런 ‘전속거래’에서 찾는다.
산업연구원은 자동차·전자·기계 분야의 10대 대기업과 전속거래를 맺은 협력업체가 2014년 기준으로 2955개에 이른다고 11일 밝혔다. 전속거래는 협력업체가 한 대기업과 장기거래를 하는 걸 말한다. 협력업체는 5~10년 이상 대기업과 거래를 유지하며, 매출액의 50% 이상을 해당 기업과의 거래에서 얻는다. 공장 설비도 대기업이 위탁한 설계도와 품질 기준에 맞춘다.
원래 전속거래는 대기업, 협력업체 모두에 이득이다. 자동차의 경우 부품 수명이 5년가량이다. 장기거래를 하면 협력업체는 안정된 공급망, 완성차 업체는 품질 유지 및 원가절감을 할 수 있다. 정부도 이를 유도했다. 1970년대 정부는 압축성장을 위해 대기업을 정점으로 하는 하도급 구조를 형성하도록 지원했다.
그러나 40년이 흐르면서 이런 구조가 협력업체에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 협력업체는 경쟁력을 잃고 있다. 대기업이 주는 설계도 등으로 맞춤형 생산을 하다 보니 다른 거래선을 뚫을 능력조차 갖추지 못한다. 자동차산업의 경우 독과점 구조도 협력업체 발목을 잡고 있다. 시장을 현대·기아차가 주도하다 보니 협력사가 다른 공급망에 눈을 돌릴 수도 없다.
여기에다 납품단가 인하 압력 등으로 협력업체는 신음한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현대차 영업이익률이 2008년부터 2015년까지 9~10%로 늘었는데 전속거래 협력업체 영업이익률은 3% 수준에 머물렀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협력업체 수익률이 3%대로 일정한 것은 대기업이 일정 목표 수준을 정하고 불공정거래로 협력사 이익률을 관리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협력업체 관계자는 “한마디로 코가 꿰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하도급거래 실태조사’를 보면 전속거래를 맺은 협력업체 60%는 “원사업자 요구에 의한 것”이라고 답했다.
전속거래 문제를 한 번에 풀 해법은 없다. 정부가 대기업의 불공정거래행위를 단속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전속거래 자체를 막기는 힘들다. 대기업은 스스로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는 마당에 그동안 효과를 본 수직계열화 구조를 내려놓기 어렵다. 이 선임연구위원은 “한국의 협력업체는 ‘조립 역량’만 있다는 것이 제조업 위기의 근본 원인”이라며 “정부가 전속거래 문제부터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종=전슬기 기자 sgj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