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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말안장 위 24년… 개혁군주 정조의 일생

정조는 어릴 때부터 총명했고 독서광이었다. 할아버지인 영조가 뭔가를 물으면 “메아리처럼 응답을 잘하는” 세손이었다. 하지만 백면서생에 책상물림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승마를 좋아했고 뛰어난 궁사(弓師)이기도 했다. 사진은 영화 ‘역린’에서 정조 역을 열연한 배우 현빈.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신하들이 묻고 왕이 답했다. “성이 튼튼하면 됐지 왜 아름답게 쌓으려는 겁니까.” “웅장해야 위엄이 생기는 법이다. 불필요한 장식은 제거하고 필요한 것만 설치하도록 하라.”

여기서 왕은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이며, 성은 그가 세운 수원 화성이다. 저자는 정조의 미적 감각을 “견고박소(堅固朴素)”라는 단어로 규정하면서 애플의 창업주인 스티브 잡스를 끌어들인다.

“견고박소는 흥미롭게도 스티브 잡스와 함께 오랫동안 애플의 광고와 마케팅을 이끈 켄 시걸의 책 제목(‘미친 듯이 심플’)과 일맥상통한다. …단순하기(朴素) 때문에 친근하고, 친근하기 때문에 시간의 도전을 이겨내며(堅固) 오래도록 사랑받을 수 있다는 점, 그래서 꼭 필요한 것만 잘 만들어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수원 화성은 잘 보여준다.”

박현모(53) 여주대 교수가 펴낸 ‘정조 평전’에는 이렇듯 이색적인 시각으로 정조의 공과를 살핀 내용이 간단없이 이어진다. 정조 시대는 이미 많은 책이나 영화, 드라마를 통해 소개된 만큼 따분한 이야기가 되기 쉬운데 이 책은 진부하지 않게 정조가 거둔 성공과 실패의 스토리를 그려낸다.

요즘말로 하자면 정조에 ‘입덕’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정조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평전은 주인공의 인생 궤적을 연대기 순으로 훑어가는 방식을 취하지만 이 책은 다르다. 저자는 첫머리에서 정조 재위 24년을 개관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부분은 정조 시대 요점 노트 성격을 띤다. 이어지는 챕터는 그 시절의 정치 경제 외교 분야의 사건을 하나씩 살핀 내용이다. 독자들은 살뜰한 가이드 역할을 하는 저자의 안내를 받으며 그 시절 풍경들을 하나씩 둘러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정조는 어떤 삶을 살다간 군왕이었던가. ‘정조 평전’에는 ‘말안장 위의 군주’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말에 올라탄 사람처럼 정조는 불안과 긴장의 시간을 버텨냈다. 정조는 여덟 살 때 세손에 책봉됐고, 스물네 살이던 1776년 임금에 올라 조선의 조종간을 잡았다. 당시 조정은 혼란스러웠다. 정조와 함께 조선사의 슈퍼스타라고 할 수 있는 세종이 안정적으로 왕위에 올랐을 때와는 많이 달랐다. 하지만 그는 노련하고 탁월한 정치 감각을 보여주며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정조의 정치력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대목은 사도세자와 관련된 부분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은 정조가 떠안은 무거운 유산이었다. 아버지의 묘소는 오랫동안 서울 배봉산에 방치돼 있었는데 선대 임금이었던 영조의 뜻이었기에 정조는 이 문제를 언급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식 된 도리를 저버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묘를 이장해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는 건 정조의 숙원 사업이었다. 그는 1789년(정조 13년)이 돼서야 문제 해결에 나선다. 그런데 이때 보여준 모습이 그야말로 노련했다. 정조는 종친인 박명원(영조의 맏사위)이 사도세자 묘를 이장하는 방안을 제안하도록 했다. “우연히 찾아가 보았더니 묘소의 떼가 말라죽고 무덤의 왼쪽이 뚫리는 등 방치돼 있었다”는 상소를 신하들 앞에서 낭독하게 한 것이다. 상소문이 울려 퍼지자 정조는 눈시울을 붉혔고 신하들은 “한목소리로 빨리 (묘를) 옮길 것”을 간청했다. 그렇게 정조는 자연스럽게 이 문제를 공론의 장으로 끄집어내 아버지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는 데 성공하게 된다.

정조의 이름 앞에 ‘개혁군주’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배경에는 이렇듯 빼어난 정치 감각이 주효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저자가 무조건 정조를 떠받드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건 아니다. 정조는 신분을 막론하고 인재를 찾아내는 능력이 있었지만 누굴 상대하든 듣고 수긍하기보다는 가르치고 지시하려 했다. 쉽게 말하자면 정조는 꼰대였다. 저자는 이 점을 거론하면서 “신하들이 수동적인 자세에 머물고, 보다 활발한 토론이나 창의적인 문제 제기가 나오지 않은 것은 당시 중대한 국내외적 변화 추이에 비추어 볼 때 몹시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다”고 지적한다.

언론이 당쟁의 빌미를 제공한다고 판단해 언로를 차단했고 하급 관료인 아전 관리엔 안일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정조 사후에 조선이 쇠락의 길을 걷게 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재위 후반에는 대다수 관료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건설적인 비판이나 제안이 나오지 않았다. 그의 사후 세도정치기에는 약화된 언관들이 외척 세도가들의 권력 남용을 견제하지 못했다. 정조의 언론 개혁은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으나 환자는 죽고 말았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듯하다.”

아버지가 비명에 세상을 떠나고도 정조가 제2의 연산군이 되지 않고 어진 임금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할아버지인 영조의 공이 컸을 게 불문가지다. 정조가 아버지를 여읜 해에 영조는 손자를 데리고 거리로 나가 백성들을 만나보게 했다. 당시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오늘 구경 나온 사람들이 네게 무엇을 기대하더냐?”

“잘 해내기를 바랐습니다.”

“잘 해내기가 그리 쉬운 일이더냐?”

“쉽다고 생각합니다. 쉽다고 생각해야만 용감하게 전진할 수 있으니까요.”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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