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 위기가 유럽을 휩쓸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친환경 정책은 ‘노란 조끼’라는 역풍을 맞고 좌초했다. 과열된 반(反)이민 정서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장기집권을 종식시켰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를 이끌던 테리사 메이 총리는 자국 내 강경파들에게 휘둘리던 끝에 퇴진 위기에 몰렸다. 이탈리아에서는 기성 정당이 몰락하면서 서유럽 최초의 극우 포퓰리즘 정권이 등장했다.
위기는 대서양 건너편 미국으로 번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동맹국을 맹비난하며 유럽 지도자들의 리더십 위기를 부추겼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 자신도 11·6 중간선거에서 하원 과반을 상실한 이후 탄핵 압력을 받고 있다. 또 러시아 대선 개입 등 각종 의혹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2020년 재선에 실패할 수도 있다.
리더십 위기는 나라별로 양상은 조금씩 다르지만 근간에는 같은 정서가 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11일(현지시간) 진단했다. 세계화에 따른 양극화, 이민자 혐오, 도시와 농촌 간 갈등,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 등이 불거지면서 과거와는 다른 형태의 갈등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 수십년간 이어져온 ‘진보 대 보수’ 대립 구도에 익숙한 정치인들은 이런 현상에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있다.
이보 대들러 전 유엔 주재 미국대사는 “사람들이 지난 20~40년간 계속된 세계화에 분노하면서 사회 내부의 역학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고 말했다. 리처드 하스 미국외교협회(CFR) 회장은 “브렉시트를 둘러싼 영국의 정치적 혼란과 프랑스 정부의 항복 선언은 그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라며 “미국의 정치적 위기도 비슷한 양상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치인들이 위기를 자초한 측면도 있다. 데이비드 캐머런 전 영국 총리는 브렉시트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치면 모든 논란이 끝날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어렵게 도출한 브렉시트 합의안은 영국 의회에서 부결될 위기에 놓였다. EU 역시 합의안 수정에 난색을 표하고 있어 메이 총리만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집권 보수당은 12일 브렉시트 협상 실패 책임을 물어 메이 총리를 불신임 투표에 부쳤다.
메르켈 총리 역시 국민 정서를 읽지 못하고 중동 난민을 대규모로 받았다가 강력한 반발에 직면했다. 일단 메르켈 총리는 자신과 가까운 안네그레트 크람프-카렌바우어에게 기독민주당 대표직을 물려주면서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연립정부가 좌파 성향 녹색당과 극우 성향 ‘독일을 위한 대안(AfD)’ 양쪽의 도전을 뿌리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마크롱 대통령은 기성 정치질서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이용해 돌풍을 일으켰다. 마크롱 대통령 본인은 물론 집권당 ‘레퓌블리크 앙마르슈’ 당원들 대부분 정치 경험이 없었지만 정부와 의회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에 맞서며 기존 국제무역 질서와 EU를 대변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하지만 자국 내 분위기를 제대로 읽지 못해 한순간에 ‘부자들의 대통령’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특히 친환경을 명분으로 내건 유류세 인상은 노란 조끼 시위를 촉발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유류세 인상 철회, 최저임금 인상, 서민층 면세 확대 등을 발표함으로써 간신히 불만을 잠재웠지만 개혁 동력은 사실상 바닥난 상태다.
프랑스가 이탈리아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탈리아에서는 지난 5월 포퓰리즘 성향 오성운동과 극우 성향 동맹당이 연정을 이루면서 서유럽 초유의 극우 포퓰리즘 정부가 탄생하고 말았다. 새로 출범한 이탈리아 정권은 EU의 재정적자 감축 요구를 무시하며 대립해 왔다. 마크롱 대통령은 한때 EU의 재정 건전성 유지를 위해 재정적자 감축을 지지해 왔지만 이번에 노란 조끼 시위대의 요구를 대폭 받아들이면서 프랑스 역시 대규모 재정적자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탈리아 전문가들 상당수는 프랑스 노란 조끼 시위대의 요구사항이 오성운동·동맹당의 주장과 같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고 전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