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그라나다의 한 광장을 서성이는 남자. 광장에 서 있던 전사(戰士)의 동상이 움직이더니, 그의 앞에 칼을 내리꽂는다. 남자의 손에서는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진다. 그는 이렇게 죽게 되는 걸까.
죽지 않는다. 남자가 마주한 건 현실이 아니라 가상의 세계 속 한 장면일 뿐이다. AR(증강현실) 게임이라는 신선한 소재를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tvN)이 안방을 달구고 있다. 1~3회에서 7%(닐슨코리아)대 시청률을 보이다가, 최근 4회에서 8.2%를 기록하며 상승세를 타고 있다.
드라마는 IT 투자회사 대표인 유진우(현빈)가 출장차 스페인 그라나다에 가 정희주(박신혜)가 운영하는 싸구려 호스텔에 묵게 되면서 겪는 기묘한 일들을 담은 서스펜스 로맨스물이다.
초반엔 우려도 있었다. 증강현실이라는 낯선 소재가 극에 제대로 녹아들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로맨스와 서스펜스라는 이질적 장르의 결합도 어려워 보였다. 결과적으로 증강현실을 택한 건 성공적이었다.
극본을 쓴 송재정 작가는 화살이 날아들고, 피가 난무하는 AR 게임을 통해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을 녹여냈다. 로맨스의 실마리를 곳곳에 심어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인’(2013·tvN) ‘더블유’(2016·MBC) 등 시공간을 오가는 독창적 작품을 선보여온 그의 능력은 여기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친절한 장면 구성은 게임을 잘 모르더라도 몰입이 수월할 수 있도록 도왔다. 유진우가 게임을 하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담아내면서도 압축적으로 풀어내 지루함을 피했다. 차가 부서지거나 하늘에서 검이 내려오는 등 수준 높은 컴퓨터그래픽(CG)도 극의 설득력을 높였다.
이런 서스펜스적 요소를 통해 드라마는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게임의 주 소비층인 남성들까지 외연을 넓혔다.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는 “게임에서 중요한 요소인 레벨 시스템이나 아이템 같은 부분들을 디테일하게 담아냈다”며 “파격적인 소재를 통해 극 초반 이목을 집중시킨 영리한 드라마”라고 말했다.
실제 온라인상의 반응을 살펴보면, 드라마가 로맨스물이라기보다는 호러나 추리물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 방송 이후 ‘예측이 안 된다’ ‘무섭다’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하다’ 등의 반응이 나왔다. 숱한 복선을 깔아놓은 탓에 다음 전개를 추측하는 글이 주를 이룬다.
오랜 시간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오가며 연기력을 다져온 현빈과 박신혜의 캐스팅도 주효했다. 특히 현빈은 촬영 시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칼을 휘두르고 몸을 던져야 했을 텐데도 마치 실제인 양 박진감 넘치는 액션을 선보였다.
증강현실이란 독특한 소재를 얼마만큼 집중력 있게 끌고 갈 수 있을지가 관건으로 보인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지금까지는 시청자들의 예상보다 딱 반보 앞에서 반전을 주며 극을 흡인력 있게 끌고 왔다”며 “증강현실이라는 큰 틀을 끝까지 가지고 가면서 로맨스를 함께 풀어낸다면 작품성 높은 드라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