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① 주저앉는 지역경제
② 번지는 불황의 불길
③ ‘무용지물’ 구조조정
④ 위기 극복의 길
⑤ 끝·변신을 두려워 말라
주력 제조업이 무너지면서 지역경제 전체가 쇠락하는 ‘러스트 벨트(Rust Belt·쇠락한 공장지대)’ 현상은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얘기가 아니다. ‘성장→성숙→둔화→쇠퇴’를 반복하는 산업 사이클은 제조업을 중심에 두는 지역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스웨덴 말뫼와 스페인 빌바오는 1980~90년대 지독한 ‘지역경제 몰락’을 겪었다. 조선 산업에 의존하던 두 도시는 신흥강자로 부상한 한국에 수주물량을 빼앗기면서 지역경제 전체가 무너졌다. 말뫼에 있던 조선업체 코쿰스는 상징과도 같았던 크레인을 1달러에 현대중공업으로 넘겨야 했다. 이른바 ‘말뫼의 눈물’이라는 말이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2% 초반대였던 말뫼의 실업률은 90년대 22%까지 치솟기도 했다. 빌바오도 조선업 경쟁력 상실로 80년대 초반 실업률이 25%까지 뛰었다.
지금 말뫼와 빌바오는 완전히 다른 도시로 탈바꿈했다. 말뫼는 신재생에너지·정보기술(IT)·콘텐츠 도시로, 빌바오는 문화·관광도시로 변신했다.
물론 단숨에 해법을 찾은 것은 아니다. 10~2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기존 주력 산업을 연명하는 식의 정책이나 다른 제조업으로의 단순 대체는 모두 실패하기도 했다. 말뫼는 코쿰스 조선소에 340억 크로나(약 4조8773억원)에 이르는 공적자금을 투입했지만, 살리지 못했다. 1크로나를 받고 코쿰스 조선소 부지를 자동차 제조업체 사브에 제공하며 자동차 도시로의 재기도 꿈꿨지만 2년6개월 만에 문을 닫았다.
두 도시의 부활은 길게 보고 새로운 길을 찾으면서 이뤄졌다. 첫 단추는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지역 전문가, 시민이 머리를 맞대는 협의체 구성이었다. 빌바오는 91년 ‘빌바오 메트로폴리스-30’이라는 협의체를 만들어 청사진을 그렸다. 협의체에 소속된 800여명의 연구 인력은 ‘지식기반 산업영역 조성’ ‘옛 도심 재생’ ‘환경보호’ ‘문화주도 재생’이라는 네 가지 실행 계획을 도출했다. 일본 철강 산업의 중심지였으나 쇠락한 기타큐슈 역시 ‘기타큐슈활성화 협의회’를 설립해 환경 산업 도시로의 전환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런 첫걸음부터 다르다. 한국은 중앙정부가 주도하는 단기 대응에 머물고 있다. 정부는 올해 상반기 울산 동구, 전북 군산 등을 고용·산업 위기지역으로 지정했지만, 대책의 대부분은 근로자·실직자 생계안정과 재취업 지원, 지역 협력업체 지원 등에 국한됐다. ‘급한 불’을 끄느라 지역 산업 전반을 아우르는 청사진, 로드맵을 제시하는 작업은 뒤로 밀렸다. 민간연구소 LAB2050의 황세원 연구실장은 16일 “지역경제 회생을 위해 중앙정부, 광역지자체, 기초지자체 등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다르다. 협의체를 구축하고 역할 분담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윤곽이 나왔다면 연구·개발(R&D)이 뒤따라야 한다. ‘두뇌’를 유치하고, ‘사람’이 살 만한 도시로 만드는 것이다. 빌바오는 ‘비스카이아 과학기술단지’라는 첨단산업단지를 조성해 전통 제조업의 첨단화를 꾀했다. 수익의 10% 이상을 R&D에 투자하는 혁신지향 기업이 산업단지에 입주했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역의 경우 조선 산업 몰락 이후 대형 항공기업체가 들어올 수 있도록 R&D기관 유치에 집중해 지역경제 구조조정에 성공했다.
R&D 투자로 보면 한국이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투자 비중(4.55%)은 세계 1위 수준이다. 하지만 대부분 민간영역의 투자다. 정부의 R&D 예산 증가율은 2014년 5%에서 최근 4%대로 낮아졌다. 내년에 사상 처음으로 20조원이 넘는 예산을 R&D에 투입할 계획이지만, 지역 산업 구조조정과 직접 연관된 R&D 예산은 2911억원에 불과하다.
전문가들은 R&D 예산이 제대로 쓰이는지도 짚어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을 지낸 정만기 글로벌산업경쟁력포럼 회장은 “그 많은 돈을 투입했는데, 최고기술 보유국 대비 한국의 기술은 78.6% 수준이다. 그만큼 제대로 성과가 나고 있지 않다”고 꼬집었다.
정 회장은 독일의 R&D 조직인 ‘프라운호퍼협회’ 모델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협회는 독일 전역에 66개 연구기관을 두고 있다. 연구자들은 기업 과제를 우선 선정해 반드시 성과를 내야 한다. 기업 과제에서 실적을 내지 못하면 연구자의 자율 과제 예산은 깎거나 배정하지 않는다. R&D 결과물이 곧바로 지역 산업에 응용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새로운 산업을 이끌어갈 인력을 유인하는 정책도 필수다. 산업연구원 이항구 선임연구위원은 “자동차 산업만 봐도 전기차나 수소차 연구인력은 태부족이다. 사람이 없다보니 기술 개발에 걸림돌이 된다.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R&D시설을 유치하면서 하드웨어는 갖추고 있다. 다만 그 안에서 연구를 수행할 인력을 길러내고 유인하는 데는 소홀하다”고 말했다.
부활에 성공한 도시들이 가장 주력한 것은 인재 끌어들이기였다. 말뫼는 2억5000만 크로나(약 359억원)를 투입해 코쿰스 조선소 부지에 주거지역을 포함한 친환경 뉴타운을 세웠다. 뉴타운에는 과거 조선소 근로자보다 1.5배 많은 인구가 살고 있다. 말뫼와 덴마크 코펜하겐을 잇는 외레순 대교를 비롯해 도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사회간접자본(SOC) 사업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 말뫼대학교도 설립했다.
빌바오는 네르비온강 환경 개선 사업에 8억 유로를 투입했고, 항만·공장을 철거한 해안지역에 강변공원과 문화시설을 조성했다. 황세원 연구실장은 “청년층을 비롯해 사람들이 살고 싶은 도시를 만드는 게 우선이다. 인재가 들어오면 그들이 하고 싶은 산업이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온다”고 강조했다.
세종=정현수 전슬기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