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축구 대표팀을 동남아시아 정상, 아시아 정상으로 만들겠다.”
박항서(59) 감독은 지난해 10월 11일 베트남 축구 대표팀 취임 기자회견에서 “나를 선택한 베트남 축구에 축구인생의 모든 지식과 철학, 열정을 쏟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박 감독의 공언이 있은 지 14개월 만에 베트남 축구가 동남아 정상에 우뚝 섰다. 아시아축구연맹(AFC) 23세 이하(U-23) 선수권 준우승,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4강 진출로 1년 내내 축구에 열광한 베트남은 스즈키컵 우승으로 올해 축구 축제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파파(아버지) 리더십’으로 베트남 축구 역사를 고쳐 쓰고 있는 박 감독은 다음 달 아시안컵에서 한 번 더 ‘박항서 매직’을 가동한다.
노장의 도전
다음 달 4일 환갑을 맞는 박 감독에게 베트남행은 새로운 도전이면서 기회였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을 보좌하며 4강 신화를 쓴 그는 같은 해 부산아시안게임 대표팀을 맡았다가 동메달을 딴 후 물러났다. 이후 K리그 경남, 전남, 상주 지휘봉을 잡았지만 베트남을 선택할 때는 내셔널리그(3부 리그) 창원시청을 맡고 있었다. 부임 당시 이러한 사정 때문에 베트남 국내에선 반발 여론도 적잖았다.
하지만 박 감독은 대회를 거듭하면서 의구심을 환호로 바꿔놓았다. 먼저 지난해 12월 U-23 대표팀을 이끌고 참가한 M150 CUP에서 태국을 2대 1로 꺾고 3위에 올랐다. 한·일전처럼 라이벌 의식이 강한 베트남과 태국 간 경기인 데다 적지에서 승리하면서 베트남 팬들이 박 감독을 주목하는 계기가 됐다.
지난 1월 AFC U-23 선수권은 박항서 매직의 출발점이었다. D조 첫 경기에서 한국에 역전패했지만 호주(1대 0), 시리아(0대 0)전에서 1승 1무를 기록했다. 8강 진출 이후에는 이라크, 카타르를 승부차기로 내리 돌려세웠다. 결승에서 우즈베키스탄에 1대 2로 패했지만 베트남 축구 사상 처음으로 AFC 주관 대회 결승에 올랐다. 그 전에는 8강에도 오르지 못했다. 지난 9월 아시안게임에선 박항서 매직이 우연이 아님을 입증했다. 베트남은 우승 후보 일본이 속한 D조에서 3승으로 조 1위를 차지한 후 8강에선 시리아를 1대 0으로 꺾고 4강에 진출했다. 4강에서 한국에 패했지만 아시안게임 4강 진출 역시 베트남 축구 역사상 최고 성적이었다.
지난 15일 10년 만의 스즈키컵 우승은 박항서 매직이 A 대표팀에도 통함을 보여줬다. 말레이시아와의 원정 1차전에서 2대 2 무승부를 기록한 후 홈에서 1대 0으로 승리하면서 베트남을 또 한 번 들썩이게 했다. 베트남은 2008년 엔리크 칼리스토(포르투갈) 감독 재직 시절 스즈키컵에서 우승한 것이 축구 국제대회 최고 성적이었다.
친근하게 따뜻하게
베트남 U-23 대표팀은 자국에서 기대가 높은 세대다. 베트남 최초 K리거인 쯔엉(23)을 비롯해 선진 축구 훈련법으로 육성돼 좋은 성적을 낼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지난해 8월 동남아시아(SEA) 게임에서 4강 진출에 실패하며 전임 국내 감독이 경질됐다. 베트남은 외국 감독에 대한 평가 역시 냉혹한 곳이다. 베트남은 1991년 이후 평균 1년에 한 번 감독이 교체됐다.
이 같은 상황에서 박 감독이 단기간에 팀 능력을 극대화하고 이를 유지한 데는 그의 파파 리더십이 적잖은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 감독은 선수들에게 농담을 던지거나 자주 장난을 걸며 팀에 녹아들었다. 지난 9월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선수들에게 직접 발마사지를 해주는 장면이 해당 선수의 SNS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지난 7일 스즈키컵 결승이 열리는 말레이시아로 향하는 기내에선 부상을 입은 선수에게 자신의 비즈니스석을 양보하며 “부상당한 널 편한 자리에 앉혔어야 하는데 깜빡했다. 미안하다”고 말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됐다. 지난 15일 박 감독의 스즈키컵 우승 기자 회견 도중 선수들이 중간에 들어가 물을 뿌린 것도 파파 리더십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또 스즈키컵을 통해 확인했듯이 강한 수비를 바탕으로 한 짜임새 있는 팀을 만드는 데도 성공했다. 베트남은 스즈키컵에서 결승까지 4골만 허용하는 안정된 수비를 바탕으로, 공격 시에는 위협적으로 상대 골문을 파고 들었다. 결승 2차전에서 최전방 공격수로 선발 기용한 베테랑 응우옌 안둑(33)이 전반 6분 만에 결승골을 넣는 등 대회 기간 용병술도 빛났다.
박 감독으로 인해 한국인 및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좋아 지고 있다. 경기장에서 베트남의 국부인 호치민과 박 감독의 초상화가 나란히 잡히거나 태극기를 들고 응원하는 팬들의 모습이 자주 비쳤다. 박 감독은 우승 후 “저를 사랑해주시는 만큼 내 조국 대한민국도 사랑해 달라”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16일 페이스북에 한글과 베트남어로 “축구를 통해 양국이 더욱 가까운 친구가 됐음을 실감했다”며 축하했다.
김현길 박세환 기자 h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