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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전정희] 3·1운동 백주년과 공동체 정신



36년 전 대학생 기자 시절에 찾은 경기도 화성군 제암리교회는 농촌의 한적한 예배당 풍경 그대로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수십명이 문이 잠긴 이 교회에 갇혀 불에 타 죽었다. 일본은 4월 15일 ‘독립운동에 가담하는 자는 최소 징역 10년, 독립자금을 대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문을 냈고 제암리교회 학살은 시범 사례가 됐다.

이후 교회는 감시에 눌려 해방 후까지 전임 목회자가 없었다. 교회는 59년 이승만 대통령이 친필을 내린 후에야 조직교회로서 틀을 갖췄고 69년 일본의 기독교인들이 대신 사과하고 성금으로 예배당을 지어주면서 성역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82년 그때 살아남은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으로 학살 매장된 시신 23구가 발굴되기도 했다. 지금은 이름도 제암교회로 바뀌었고, 개발이 진행되면서 도시형 교회가 됐다. 어떤 이유에선지 3자와 1자를 형상화한 일본 기독교인 헌당 예배당을 허물어 버렸다. 제암리교회라는 이름에 담긴 역사성과 일본 기독교인 마음이 담긴 인류애가 버려진 것 같아 안타깝다.

대한제국 때까지 경기 남부는 수원부 화성 정도를 제외하곤 전역이 전근대성 그대로였다. 농촌계몽운동가 최용신이 안산 샘골에서 숨을 거둔 35년 무렵. 작가 겸 기자 심훈이 그의 안타까운 죽음을 취재하기 위해 수원과 발안을 거쳐 안산으로 향하는데 그때까지도 흙길 신작로가 고작이었다. 이 길도 일제가 수탈을 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발안은 제암리교회 교인들이 몰려가 장날 시위를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100년이 지난 지금, 옛 수원부인 수원시와 화성시는 정보기술(IT) 강국 대한민국을 탄생시킨 땅이 됐다. 80년대 반도체 공장이 수원에 본격 가동되면서 오늘날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를 연 결정적 계기가 됐다. 6·25전쟁 당시 포격에 파괴된 팔달문과 화성 성벽에서 미군 병사의 카메라를 향해 초라하게 포즈 취하던 이들의 사진은 아주 먼 얘기가 아니라 불과 68년 전 우리의 삶이었다.

우리의 지난 100년은 3·1운동 정신이 가져다준 피의 역사며 저항의 역사다. 불평등하고, 부패하고, 불합리할지라도 우리는 그 부조리함을 하나하나 개선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2019년 3·1운동 백주년을 맞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민족·이념운동이 아니다. 이웃과 함께 하는 공동체운동이다. 앞으로 100년을 살아갈 청년들에게 더욱 권하고 싶은 말이다.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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