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무명의 설움을 견딘 더벅머리 젊은이들이 만든, 1985년 그룹 들국화의 거침없는 성공은 60여년 동안 수정되지 않았던 한국 대중음악사의 거대한 패러다임을 폐기시킨 사건이었다. ‘그것만이 내 세상’이 전인권의 고고한 육성으로 울려 퍼질 때 이들의 젊은 후원자들은 참으로 ‘후회 없이’ 이들의 ‘가꿔왔던 꿈’을 만끽했다. 이들의 노래를 놓고 어느 누구도 ‘유행가’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것은 ‘음악’이었으며 들국화는 ‘가수’나 ‘딴따라’가 아니라 ‘아티스트’였다. 사람들은 이때쯤부터 자신의 문화적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외국 음악가의 이름과 앨범을 읊조릴 필요가 없어졌다.
오로지 음반과 라이브 콘서트라는 정공법을 택한 이들은 김현식과 조동진을 위시한 비주류권 동료들과 더불어 비틀스부터 퀸에 이르는 서구 대중음악사의 화려한 리스트를 동경하던 이 땅의 대중음악 수용자들로 하여금 우리 노래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만드는 아름다운 승리를 가져왔다.
들국화가 바꿔놓은 가요계 지형도
그 선두를 장식한 인물은 다름 아닌 들국화라는 무명의 밴드. 동아기획에서 나온 이들의 데뷔 앨범은 TV나 라디오 같은 전지전능한 힘을 지닌 전파 매체의 도움 없이 발매 연도에 이미 100만장 넘게 팔리는 기적을 연출한다. 이들의 앨범 재킷 디자인이 비틀스의 마지막 앨범 ‘렛 잇 비(Let It Be)’를 흉내낸 것은 참으로 시사적이었다. 주류의 경기장에서 조용필이 분전하는 동안, 냄새나는 지하 연습실과 파고다극장 같은 열악한 소극장에서 칼을 벼려온 이 비주류의 전사들은 한국판 ‘언더그라운드’라는 질풍노도의 깃발을 올린다. 방송국 PD들이 장악하고 있던 살생부의 권위를 무시한 채 이들은 끝없는 소극장 콘서트와 앨범만으로 복마전의 지뢰밭을 정면 돌파했다. 들국화는 같은 해 절치부심의 두 번째 앨범을 발표한 김현식과 함께 이 전투의 쌍벽을 이루는 선봉장이었다.
군부독재의 통제와 검열 아래서 이들이 거둔 성과는 정녕 놀라운 것이었다. 우리는 이들을 이끌었던 새로운 레이블 동아기획과 ‘대장’이라고 불렸던 프로듀서 김영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 된다. 통기타학원 경영으로 많은 돈을 벌었던 그는 작곡가로는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친구 이장희가 벌려놓은 제작을 떠맡으며 제작자로 변신했다. 그에게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안목이 있었고, 그 안목에 걸려든 뮤지션에게는 무한의 표현의 자유를 주고 간섭하지 않았다.
그리고 방송사의 시녀로 전락하기를 거부하는 젊은 뮤지션들의 자존심을 오히려 격려함으로써 히트곡 대신 앨범의 완성도를 중요시하는 뮤지션들의 신뢰를 획득했다. 뮤지션십에 대한 존중, 바로 이 같은 태도가 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영광을 가져온 동아기획의 핵심이었다.
들국화와 김현식의 전설적인 성공은 동아기획이 지구레코드를 누르고 주류 음반사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동아기획은 조동진 사단의 시인과 촌장과 장필순, 김현식 백밴드 출신인 봄여름가을겨울, 신촌블루스와 한영애, 그리고 이소라를 배출한다. 저달러·저유가·저금리의 3저 호황이라는 경제적 여유 위에서 도전적인 새로움을 바라던 10대와 20대들은 이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고, 75년 이후 기나긴 매너리즘의 터널 속에 움츠리고 있던 이 땅의 대중음악은 마침내 잠에서 깨어나게 된다.
이는 70년대 전반 김민기와 신중현의 출현 이후 10년 만에 한국 대중음악이 맞은 소중한 승리였다. 이들이 등장함으로써 주류와 비주류는 견제와 균형의 2인 3각 경주를 펼치게 됐다. 비록 소극장 규모에 한정되긴 했지만 라이브 콘서트의 생명력이 존중받는 기틀이 다져졌다. 재기에 성공한 정태춘·박은옥 부부가 ‘이야기 노래마당’이라는 일련의 전국 순회 소극장 투어로 성공을 거둔 것도 이 새로운 포맷이 연착륙하는 데 힘을 실어주었다. 또한 ‘아티스트’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최소한의 증명서인 싱어송라이터의 가치가 재평가되었으며, 송골매 정도를 제외하면 고작 나이트클럽 무대를 전전하면서 기약 없는 하루를 보내야 했던 밴드 문화에도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짧지만 강렬했던 들국화의 전성기
일본 엔카(演歌)에 의해 시작돼 미국 스탠더드 팝 문법으로 성장한 한국 대중음악은 드디어 변방의 독자성을 완성하기 시작했다. 조용필을 제외하면 극도의 매너리즘에 빠진 주류 진영을 가볍게 무시하면서 들국화와 김현식은 자유분방하고 원색적인 자신만의 음색을 토해냈다. 무엇보다도 대중음악가의 생사여탈권을 휘둘렀던 네트워크의 권능을 비웃으며 이들은 오로지 음반과 콘서트로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85년에 나온 김현식의 2집과 들국화의 데뷔앨범은 바로 한국 대중음악의 비극적인 운명을 뒤바꾼 사자후였던 셈이다. 10대들은 TV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던 이들을 알아보았고, 이들의 열렬한 지지자가 됐다. 김현식의 육탄 돌격적인 보컬이 빛나는 ‘사랑했어요’와 ‘어둠 그 별빛’은 그 이후 대중음악을 꿈꾸는 어린 후계자들의 이정표가 되었다.
역시 길들여지지 않은 재능으로 가득했던 젊은이들로 구성된 들국화는 어떠했는가. 이들이 숨도 돌리지 않고 토해낸 ‘행진’이나 ‘그것만이 내 세상’은 매니지먼트와 방송국 프로듀서들의 합작 아래 스타덤에 오른 온실 속 화초들과는 근본이 다른, 글자 그대로 ‘들국화’였다. 시시껄렁한 사랑타령이나 ‘아! 대한민국’ 같은 국책성 짙은 노래들과 달리 들국화의 음악은 음악만이 자신의 삶이었던 이들의 진실 그 자체였다. 아울러 이 여과되지 않은 솔직한 숨결은 온갖 금기와 규제에 목 졸려져 있던 어리고 젊은 대중들에게 큰 울림을 선사했다.
이 일군의 음악가들의 진군에 가장 놀란 이들은 방송국의 프로듀서들이었다. 이들은 대중음악을 좌지우지해온 자신의 권위가 상처받는 수모를 감내하며 이들의 음악을 틀어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들에 의해 이뤄진 혁명적인 변화는 대중음악 수용자층의 변화일 것이다. 권력과 네트워크의 통제 하에 철저히 수동적인 태도로 대중음악을 향유해왔던 사람들은 더 이상 ‘팝송’이라는 문화적 허위의식에 구금당해 있을 필요가 없게 됐다.
사람들은 참신하고 새로운 음악가들을 찾아 나섰으며 기꺼이 그들의 후원자가 됐다. 약간 틀린 말이긴 하지만, 이렇게 해서 이른바 ‘언더그라운드의 신화시대’가 도래하게 됐으며 서구 대중음악의 압도적인 우위는 역시 압도적인 비율로 역전되기 시작한다. 김현식은 이미 망자가 되었고 들국화 역시 해산의 운명을 맞고 뿔뿔이 흩어져 이제는 그 위세가 사라졌지만 이들이 남긴 불퇴전의 전승비(戰勝碑)는 한국 대중음악 사상 가장 고귀한 결정(結晶)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 밴드의 치명적인 한계는 이 하나의 앨범을 마지막으로 팀워크가 붕괴됨으로써 더 이상의 후속 작업을 진전해 나가지 못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85년 가을부터 몰아친 들국화의 전국적인 열풍은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사그라진다. 밴드 문화의 고질적인 병폐, 이른바 멤버 간의 음악적 견해의 충돌이 날로 심해졌고, 두 번째 앨범에서는 지리멸렬할 정도로 밴드의 구심력이 와해돼 있었다. 너무 이른 성공이 이들의 분열을 앞당긴 것일까. 이들은 두 장의 정규 앨범과 두 장짜리 라이브 앨범을 끝으로 1기 들국화의 막을 성급하게 내리고 만다.
깨어 있는 대중음악가에겐 최대의 치욕이었던 앨범 내의 ‘건전가요’ 삽입 명령에 대해 아카펠라곡인 ‘우리의 소원’으로 응답한 이들의 거칠 것 없던 반항의 정신은 신화로 남았다. 밴드의 해산 이후 전인권이 솔로로 혹은 키보드 멤버 허성욱과의 듀오 앨범으로 더욱 성숙한 세계를 펼쳐 보인 것은 들국화의 열광적인 팬들에게는 훌륭한 선물이 됐지만, 밴드를 통해 그 성장이 이어져 갔더라면 더욱 보배로운 결과물이 됐을지도 모른다. 최성원 또한 두 장의 솔로 앨범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견고하게 보여주다가 이적과 김진표가 팀을 이룬 패닉의 제작자로 변신해 또 한 번의 성공을 거두게 된다.
90년대 이후 들국화는 몇 차례 재결성하려고 했다. 전인권의 독단으로 들국화의 결성이 이뤄져 원성을 사기도 했고, 2001년 이들을 상찬하는 트리뷰트 앨범 발표 이후 전인권과 최성원, 그리고 주찬권을 중심으로 거의 재결합에 성공하는 듯했으나 무산됐다. 이들은 10여년이 훨씬 지난 뒤에야 결국 다시 만나게 된다. 그러나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기 직전 주찬권이 돌연 세상을 떠남으로써 들국화는 또다시 해산하게 된다.
강헌<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