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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태원준] 사자성어



네 글자로 말을 만드는 건 묘한 재미가 있었다. 시험을 앞두고 부자유친(父子有親)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삼강오륜을 외우는 게 지겨웠던 아이들은 사자성어 말하기 시합을 했다. ‘임전무퇴(臨戰無退)’ ‘타산지석(他山之石)’ ‘용두사미(龍頭蛇尾)’ 하면서 고사성어를 하나씩 꺼내다 밑천이 드러나면 ‘신속배달’ ‘조조할인’을 말하곤 했다. 어린 시절의 사자성어 놀이를 아련히 기억하는 어른들은 네 글자의 뜻을 바꿔가며 논다. 어느 온라인 게시판에 정리된 직장인용 사자성어에서 순망치한(脣亡齒寒)은 ‘순간 망치로 한 대 칠 뻔했네’, 일취월장(日就月將)은 ‘일요일에 취하면 월요일에 장난 아님’, 고진감래(苦盡甘來)는 ‘고용해줘 진짜 감사한데 집에 갈래’란 뜻이었다.

사자성어의 묘미는 복잡한 사안을 네 글자로 압축하는 데 있다. 그 뜻을 이해하려 압축을 푸는 과정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이맘때면 등장하는 ‘올해의 사자성어’가 그렇다. 2001년 처음 선정된 네 글자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다. 각종 부패 스캔들이 잇따른 현실을 꼬집었다. 대선이 열린 2002년의 이합집산(離合集散)과 노무현정부 첫해인 2003년 우왕좌왕(右往左往)까지는 비교적 쉬웠는데 2004년 당동벌이(黨同伐異)부터 한자가 어려워졌다. 그래야 사람들이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는 깊은 뜻이 있었다. 호질기의(護疾忌醫·2008) 혼용무도(昏庸無道·2015) 등 생소한 사자성어의 의미는 매번 부정적이었다. 문재인정부가 출범한 지난해 처음 긍정적 의미의 파사현정(破邪顯正·그릇된 것을 깨고 올바름을 구현한다)이 꼽혔다가 올해는 중립적 뉘앙스로 돌아선 임중도원(任重道遠·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이 낙점됐다.

만약 지금 사자성어 놀이를 한다면 밑천이 떨어질 때 튀어나올 네 글자는 ‘전수조사’와 ‘속도조절’이 아닐까 싶다. 올해 참 많이 들린 어휘였다. 전자는 정부가 주로 말했고 후자는 정부를 겨냥해 말했다. 안전 참사가 벌어질 때마다 내놓는 대책은 전수조사였다. 최저임금 인상 속도를 감당할 수 없다면서 많은 이들이 조절을 주문했다. 숱하게 전수조사를 했지만 고시원에서, 펜션에서 사람은 계속 죽어나갔다. 마침내 속도조절을 수용해 최저임금 계산에서 약정휴일을 뺐는데 기업은 여전히 부담을 토로한다. 전수조사를 전수조사해야 할 판이고, 속도조절의 속도를 높여야 할 판이니, 그야말로 임중도원이다.

태원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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