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향(54)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정의연) 이사장은 27년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곁을 지켰다. 한국 사회마저 외면했던 할머니들을 앞장서 껴안았고, 성노예를 부정하고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 정부와 정면으로 맞선 사람이다. 그의 용기는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그는 이웃을 내 몸처럼 돌보라던 부모님의 기독교적 가정교육이 용기의 원천이라고 했다. 27일 서울 마포구 정의연 사무실에서 윤 이사장을 만나 삶과 신앙 이야기를 들었다.
“예수 욕 먹이지 마라” 가르침
그는 경남 남해 남면의 우형동네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농사꾼인 부모는 가난했다. 친척 집 작은 방에 얹혀살았다. 부모님이 새벽일을 나가면 장녀인 그가 집안일을 했다. 세 살 때부터 동생을 돌봤고 일곱 살 때부터 밥을 지었다. 부모님은 신앙심이 깊었다. 주일엔 온 가족이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교회로 갔다. 부모님은 경건하게 살라고 가르쳤다.
“교회에 가면 의자에 바로 앉지도 못했어요. 목도리나 모자를 벗고 옷에 먼지를 턴 뒤 무릎 꿇고 기도한 뒤에야 앉을 수 있었죠.”
농사일이 바빠도 매일 가정예배를 드렸다. 집으로 놀러 온 친구들은 고구마를 먹다가도 그의 가족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아버지는 언제나 모범이 되는 크리스천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훈 또한 ‘참’이었다.
“어릴 때부터 ‘우리가 막살면 누가 교회 다니려고 하겠냐. 예수 욕 먹이지 말고 반듯하게 살아라’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어라’는 말씀을 귀가 따갑게 들었어요.”
부모님은 동네 걸인이 지나가면 ‘손님’이라 부르며 음식을 대접했고 차비를 드렸다. 그런 걸 보고 자랐으니 모든 사람은 소중하고 사랑받아야 할 존재라는 가치관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예수는 걸인이든 성폭력 피해자든 어떤 모습으로도 우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덕경 할머니와의 마지막 약속
원래 꿈은 목사였다. 중학교 2학년 때 한국의 1호 여성 목사인 양정신의 수기집 ‘먼동이 틀 때까지’를 읽고 남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다짐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자 시각장애인인 그가 목사가 돼 개척교회를 이끄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큰 감명을 받았어요. 저도 거친 광야에서 남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신학교에 진학했다. 아버지는 “미향이가 원한다면 날품 팔아서라도 공부시켜야지”라며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논밭을 팔아 도시로 이주했다.
목사의 꿈은 1991년 8월 14일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라고 밝힌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들은 뒤 접었다. 할머니의 증언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꿨다. 자신이 있을 곳은 강대상이 아니라 할머니들 곁이라고 믿었다. 이듬해 1월부터 정의연의 전신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간사로 들어가 지금까지 27년간 할머니들 곁을 지켰다. 일본 우익들의 억지와 협박은 나날이 거세지지만 그는 끝까지 할머니들과 함께할 생각이다.
“강덕경 할머니는 95년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2년 뒤 돌아가셨어요. 열다섯 살 때 일본군에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하셨는데 고통을 잊으려고 평생 담배를 피우셨대요. 할머니가 병상에서 고통 속에 돌아가실 때 제가 손을 잡고 약속했어요. ‘할머니, 세상에서 풀지 못한 응어리는 제가 끝까지 풀게요. 편히 놓으세요’라고 말이죠.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 약속을 믿고 돌아가셨어요. 그러니 끝까지 약속을 지켜야죠.”
할머니들과의 세월은 떨어진 나비 날개를 다시 붙이는 일처럼 조심스럽고 고단했다. 반성 없는 일본도 문제였지만 할머니를 부끄럽다고 손가락질하는 일부 한국 사회의 냉랭함도 문제였다.
“90년대 중반까지도 ‘부끄러운 일을 왜 자꾸 떠들고 다니느냐’며 항의 전화하는 분들이 계셨어요. 침묵도 모자라 우리가 스스로 할머니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안긴 거죠.”
“나비의 꿈, 한국교회 관심 절실”
한국 사회의 편견과 억압의 벽부터 무너뜨려야 했다. 할머니들에겐 끊임없는 지지와 응원을 보냈다.
“할머니들을 치유하기 위해선 꾸준히 말을 거는 수밖에 없었어요. ‘당신은 죄 없어요. 당신이 원해서 그렇게 산 것 아니잖아요. 죄인은 그때 일본인들이지 할머니가 아니에요. 숨지 마세요. 힘내세요. 제가 곁에 있을게요’라고 말이죠.”
그는 이제 더 큰 꿈을 그리고 있다. 우리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구호에 그치지 않고 전 세계 전쟁 성폭력으로 고통 받는 피해자들을 위한 운동으로 거듭나려고 한다. 2012년 3월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의 선언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할머니들은 일본이 진심으로 사죄하고 배상한다면 그 배상금 전액을 전쟁 성폭력 피해자를 위해 후원하겠다고 밝혔다. 가수 이효리씨가 기부에 앞장서자 성원이 이어졌다. 정의연은 한국군에게 성폭행 피해를 본 31명의 베트남 여성들을 만나 사죄하고 그때 모인 나비기금을 전했다.
윤 이사장은 한국교회의 지원과 기도를 호소했다. 우리의 아픈 역사를 치유하는 일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인데도 한국교회는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전쟁과 여성 인권박물관’을 짓는 데 9년이나 걸렸는데 관심을 준 교회는 없었다.
“크리스천으로서 참 이해할 수 없어요. 일본에 물건을 수출하는 기업이라면 이해하겠는데 왜 한국교회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끌어안지 않는 걸까요. 이제라도 할머니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