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분열로 난파 위기… 윤봉길 의거가 독립운동 흐름 바꿔

지난 26일 방문한 중국 상하이 마당루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유적. 임시정부는 여러 곳을 옮겨 다니다 1926년부터 6년간 이곳을 청사로 사용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궁핍했지만 김구 선생은 독립투쟁 의지를 꺾지 않았고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거사를 이끌어냈다.
 
상하이 윤봉길 의사 기념관 매헌(梅軒)에 있는 윤 의사 흉상.


“정부 명의마저 유지할 길이 막연했다. 청사 가옥세가 불과 30원, 고용인 월급이 20원을 넘지 않았으나 집주인에게 종종 소송을 당했다. 나는 처를 잃었고, 모친께서는 신(아들)을 데리고 고국으로 가셨다. 그림자나 벗하며 홀로 외롭게 살면서 잠은 청사에서 자고 밥은 직업 있는 동포들 집에서 얻어먹으며 지내니 나는 거지 중의 상거지였다.”(백범일지)

백범 김구 선생이 1920년대 중반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궁핍한 상황을 술회한 대목이다. 임시정부는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에서 1919년 4월 11일 출범했다. 당시 프랑스 조계지는 ‘자유·평등·박애’의 프랑스대혁명 정신으로 각국의 혁명가, 독립운동가를 보호해줬다. 그러나 나라 잃은 독립운동가들은 늘 벼랑 끝에 서 있었다.

상하이에는 임시정부 전부터 독립운동가들이 터를 잡았다. 상하이 망명 1세대인 예관 신규식 선생 얘기는 빼놓을 수 없다. 예관은 1905년 을사늑약의 울분을 터뜨리며 음독했다가 오른쪽 눈 시력을 잃었다. 이후 ‘애꾸눈으로 왜놈들을 흘겨본다’는 의미로 호를 ‘예관’이라고 했다.

1911년 상하이로 건너가 신해혁명을 이끈 쑨원, 천두슈, 천치메이 등 중국 혁명가들과 친분을 쌓은 예관은 6년 후인 1917년 조소앙 신채호 박은식 박용만 선생 등 14명과 함께 대동단결선언을 했다. 1910년 국권 찬탈 이후 새로운 정부를 만들자는 최초의 선언이었다. 1919년 3·1운동과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의 토대를 그가 마련했다는 평가도 있다. 예관은 이후에도 쑨원을 만나 임시정부 승인과 지원을 얻어냈다. 쑨커즈 푸단대 교수는 “신규식 선생은 중국 내 방대한 인맥을 바탕으로 임시정부 수립에 핵심 역할을 했는데 그동안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임시정부는 초기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3·1운동 이후 대한독립의 한을 품은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로 몰려왔다. 하지만 분열이 발목을 잡았다. 당시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실력양성론, 이동휘의 무장투쟁론 등이 맞서고,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계열의 파벌싸움도 격화됐다. 지금 돌이켜볼 때 외교·실력·무장투쟁을 같이했다면 조직이 얼마나 탄탄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대목이다.

그 와중에 ‘김립 암살 사건’도 있었다.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 선생의 측근인 한형권이 모스크바로 건너가 레닌에게 독립운동자금 200만 루블을 요청해 1차로 금괴 40만 루블을 받았다. 그는 시베리아에서 국무원 비서장 김립에게 돈을 전달하고 모스크바로 돌아가 20만 루블을 추가로 수령했다. 그러나 이 돈은 한인사회당 등 좌파 혁명가들 자금으로 쓰였다. 민족주의 계열은 이를 ‘임시정부 공금 횡령’ 사건으로 규정지었다. 김립은 1922년 1월 초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보낸 오면직과 노종균에 의해 암살됐다. 이동휘는 국무총리 사임 후 시베리아로 떠났다.

김구 선생은 “김립은 이 금괴로 북간도 자기 식구들을 위해 토지를 매입했고, 공산주의자라는 한인, 중국인, 인도인에게 얼마씩 지급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현재는 옛 소련 비밀문서 등을 토대로 김립이 ‘공금 횡령’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임시정부가 끝없는 분열로 지리멸렬하자 예관은 곡기를 끊었다. 결국 1922년 9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이후 통일된 민족운동을 위한 국민대표대회가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열렸다. 국내와 상하이, 베이징, 만주, 러시아, 미주 등 세계 각지에서 한인대표 120여명이 모였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놓고 러시아·만주 계열의 창조파, 국내·미주계의 개조파, 김구·이동녕 등의 고수파로 갈리면서 결국 통합에 실패했다. 이후 임시정부는 쇠락하기 시작했다. 임시정부 초기 상하이에는 독립운동가 수가 1000명에 달했으나 1920년대 중반에는 수십명으로 줄어들었다. 상하이의 젊은 독립투사들은 경제난에 당장 취직하거나 행상을 해야 했다. 생활고는 더욱 심해졌다.

“어머님께서는 청년, 노인들이 굶주리는 것을 애석히 여겼지만 구제할 방법이 없었다. 어머님은 근처 채소상이 버린 배추 껍데기가 많을 것을 보고, 매일 밤 깊은 후 그런대로 먹을 만한 것을 골라 소금물에 담가뒀다가 찬거리로 여러 항아리를 만들기도 하셨다.”(백범일지)

백범은 1926년 석오 이동녕 선생에게 등 떠밀려 국무령을 맡으며 ‘1인 다역’으로 난파 직전의 임시정부를 이끌어갔다. 긴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이봉창 의사가 백범을 찾아와 “독립사업에 헌신하기 위해 상하이에 왔다”고 했다. 그는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일왕(日王)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미수에 그쳤지만 임시정부의 존재와 독립운동 정신을 일깨웠다.

곧이어 상하이 훙커우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던 매헌 윤봉길 의사가 백범을 찾아와 “죽을 자리를 구해 달라”고 했다. 백범은 그해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경축식에서 거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매헌은 “이제 번민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고 기뻐했다. 거사 당일 백범과 아침식사를 하고 떠난 매헌은 훙커우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해 일본 군부와 정계 거물들을 살상했다. 매헌의 의거로 임시정부의 명성은 크게 높아졌다. 하지만 일제가 닥치는 대로 한인들을 체포하면서 동포들의 피해가 커졌다.

백범은 결국 5월 10일 한인애국단 영수 명의로 윤봉길 의거의 진상을 밝히는 성명을 발표했다. 백범의 목에는 현상금 60만원이 걸렸다. 임시정부는 13년간 상하이 시기를 마감하고 기나긴 피난생활에 들어갔다.

기자가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를 찾은 지난 26일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궂은 날씨에도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전날 찾은 루쉰공원(훙커우공원) 내 윤봉길 의사 기념관은 한적했다. 기념관을 둘러보는 30분간 한국인 한 가족만 눈에 띄었다. 시내 관광코스와 떨어진 곳이기 때문인 듯했다. 기념관 안에는 ‘윤봉길 의거 현장’이란 표지석과 화단 뒤로 2층짜리 정자 매헌(梅軒)이 기품 있게 서 있었다. 정자 옆 전시자료에는 매헌이 가족들에게 남겼다는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이란 글귀도 눈에 띄었다. 암울했던 시기를 온몸으로 저항한 25세 청년의 결기가 느껴져 새삼 숙연해졌다.

상하이=글·사진 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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