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니, 좋아서 그런가 봐요.”
엘리베이터 앞에 선 직장 후배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무슨 좋은 약속 있냐고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맞다. 월급쟁이에게 하루의 고단한 노동을 마치고 사무실 밖을 나서는 그 시간만큼 기분 좋아지는 순간이 있을까. 산업혁명으로 출퇴근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퇴근길의 가벼운 발걸음만큼은 인류 공통의 감정일 것 같다.
영사기를 발명한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1895년 찍은 1분짜리 무성영화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 문을 나서는 노동자들’은 그 퇴근길의 감정을 생생하게 잡은 작품이다. 공장 문이 열린 뒤 쏟아져 나오는 노동자들.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다. 그 활달한 기세 덕에 무성영화인데도 왁자한 소리, 후줄근한 냄새가 전해지는 듯하다.
독일의 영화감독이자 미디어 아티스트, 비평가인 하룬 파로키(1944~2014·사진)는 영화사의 서막을 연 이 장면을 포함해 여러 영화에 나오는 퇴근 장면을 12채널에 담은 ‘110년간의 공장 문을 나서는 노동자들’(2006)을 만들었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1934),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어둠 속의 댄서’(2000) 등 걸작들이 포함된 이 작품을 통해 영화 속에서 노동의 이미지가 어떻게 다뤄져 왔는지를 고고학자처럼 발굴해 펼쳐놓는다.
인도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파로키는 1966년 첫 단편영화 ‘두개의 길’을 선보인 뒤 베를린 영화아카데미 1기생으로 입학했다. 그러나 정치 활동을 이유로 퇴학당한 반골이었다. 독립영화를 제작하다 배급이 어려워지자 미술관 속으로 들어온 그의 회고전이 아시아 최초로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전시 타이틀이 묵직하다.
그를 매료시킨 주제는 노동·전쟁·테크놀로지의 이면이다. 특히 노동에 천착했다. 2012년부터 작고하기 전까지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 문을 나서는 노동자들’을 리메이크해 중국 항저우의 인쇄소, 포르투갈 리스본의 껌 공장,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노동기구(ILO) 등 세계 17개 도시에서 다양한 노동자들의 퇴근 모습을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파로키는 왜 퇴근시간에 주목한 것일까. 도무지 남의 일에는 관심이 없는 우리들에게 출입문 너머에서 진행되는 노동의 진실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고 싶어서가 아닐까. 그 궁금한 현실이 여기 있다는 듯 ‘노동의 싱글 숏’(2011~2017)을 통해 ‘닫힌 문 너머’의 노동 현장을 찍었다. 그가 기획자가 돼 각국 독일문화원의 공모를 통해 선정된 작가들이 자신의 나라 노동 현장을 1~2분 길이로 찍은 워크숍 프로젝트다. 그의 사후에는 예술가이자 큐레이터인 아내 안체 에만이 이어갔다.
“뤼미에르 형제처럼 찍자는 것이다. 우유부단한 숏이 아니라 이 영화의 단호한 면을 닮자는 것이다.” 초창기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아 고정된 시점에서 찍을 수밖에 없었다. 편집하지 않고 ‘원테이크’로 찍자는 그의 주문에 따라 16개 도시에서 서로 다른 작가들이 찍었지만, 마치 한 사람이 찍은 것 같은 효과를 낸다. 쑥 밀고 들어갔다가 과감히 빠지기도 하는 영상은 펄떡이는 생선처럼 싱싱하다. 회칼이 내리치는 멕시코시티 어시장, 시위 진압 전경이 등장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수술대 앞 의사와 간호사를 보여주는 보스톤….
그는 말한다. “각 도시에서는 매일 갖가지 노동이 행해진다. 구두수선공 요리사 웨이터 창문닦이 간호사 문신예술가 환경미화원 등. 대부분은 닫힌 문 뒤에서 발생한다. 노동은 흔히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상상할 수도 없다. 면밀히 조사하고 주의를 기울이고, 행동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디서, 어떤 종류의 노동을 볼 수 있나? 무엇을 숨기고 있나?”
그의 선동에 고무된 듯 위험 속에 자신을 내맡긴 노동자의 모습도 카메라에 잡힌다. 삼킬 듯 달려오는 기차. 벼랑 끝을 잡는 심정으로 철로 위 기둥에 바짝 붙어 기차가 지나가기만 기다리는 남자. 클로즈업 된 장갑과 팔딱이는 가슴을 보는 순간, 코끝이 찡해진다. 하지만 기차가 지나가고 노동자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보수공사를 한다. 그렇게 위험이 상시화된 베트남 하노이의 노동 현장 풍경을 보는 순간, 어떤 장면 하나가 오버랩 된다.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의 석탄 이송 컨베이어 벨트에 24세 목숨을 앗긴 하청노동자 김용균씨다. 죽음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으며 그가 매번 느꼈을 지옥 같은 공포를 세상은 알지 못했다. 파로키의 저 문구처럼 닫힌 문 뒤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우리는 몰랐다. 대기업에서 중소기업, 첨단의 디지털 업종까지 조폭 세계에서나 있을 법한 직장 갑질이 있었지만 우리는 몰랐다.
자식을 가슴에 묻고도 눈물 흘릴 시간을 뒤로 미루며 ‘제2의 용균이’를 막기 위해 국회를 찾아갔던 어머니의 분노 덕분에 ‘위험의 외주화 방지법안(산업안전보건법)’이 연말 가까스로 국회를 통과했다. 파로키의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새해 당신의 노동은 안녕한가. 안녕을 위해 당신은 무얼 하고 있는가라고. 2월 24일까지.
손영옥 미술·문화재 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