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함안에 사는 김순년 할머니가 차린 밥상이다. 싱그러운 나물과 구수한 된장찌개가 눈길을 사로잡는데 저 밥상의 주인공은 찌개나 반찬이 아니다. 된장찌개가 담긴 그릇 아래 종지에 담긴 갈색 장을 눈여겨보시길. 얼핏 보면 된장 같지만 저것은 토종 호밀로 담근 밀장이다.
함안에서 밀장은 ‘집장’으로 불린다. 된장보다 묽고 부드러우며 향긋한 단내를 풍기는 게 특징이다. 매년 겨울이면 할머니는 밀장을 담근다. 밀장에는 소금이 많이 들어가지 않기에 오래 두고 먹을 순 없다. 할머니는 밀장 사용법을 이렇게 설명한다. “밀장은 겨울에 담가 가지고 음력 설 있재. 설에 내먹어도 된다. 설 지나고 냉장고에 퍼 넣어야 한다. 아니면 쉬어뿐다. 안 짜서.”
그렇다면 밀장을 맛본 저자의 평가는 어떨까. 그는 풋고추를 밀장에 찍어 먹어보았다. “매콤한 고추가 달짝지근한 밀장 덕에 입안에 생기를 돋게 했다. 설탕의 끈적거리는 단맛이 아닌 밀장의 시원하고 깔끔한 단맛이 밥알 하나하나에 스며들었다. 새로운 맛이면서도 낯익은 맛이었다.”
‘씨앗, 할머니의 비밀’엔 김순년 할머니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토종 씨앗으로 농사를 짓는 할머니 9명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토종 씨앗은 할머니의 손에서 며느리에게로,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누대에 걸쳐 이어져 내려온 한국의 씨앗이다. 사람이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성장해 다시 자식을 낳아 키우듯 씨앗은 자라 씨앗을 맺는다. 할머니들은 새나 쥐가 씨앗을 훔쳐 먹지 않도록, 장마철에 씨앗이 썩지 않도록 집안 구석구석 씨앗을 숨겨두곤 했다. “할머니들이 수십 년간 쌓아온 농사의 기술과 씨앗의 지혜, 밥상의 노하우는 비밀에 부쳐져 왔다. 이제는 할머니의 손과 몸으로 기억해 온 삶의 보고를 밝혀야만 한다. 씨앗과 밥상에 담긴 할머니의 비밀에 귀기울일 때가 왔다.”
‘씨앗, 할머니의 비밀’을 읽으면 밥이 되고 국이 되고 반찬이 되는 씨앗의 광활한 세계를 만나고, 우리의 삶이 작은 씨앗 덕분에 가능하다는 자명한 진리를 실감하게 된다. 시인 김종구의 시구처럼 밥숟가락엔 우주가 얹혀 있는 법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