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계 최초로 세계은행(World Bank) 수장에 오른 김용(59) 총재가 임기를 3년5개월이나 남겨둔 상황에서 돌연 사퇴를 선언했다. 김 총재는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갑작스러운 중도하차 이유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와의 끊임없는 불화설 때문이라는 관측이 신빙성 있게 제기된다. 이와 함께 앞으로 후임자 선정을 놓고 미국과 다른 국가 간 갈등이 불거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김 총재는 7일(현지시간) 세계은행 이사회에서 2월 1일 사퇴하겠다는 의사를 공식 표명했다. 그는 성명을 통해 “빈곤을 종식시키는 일에 열정적인 사람들로 가득 찬 기관의 총재로서 일한 건 큰 영광이었다”고 밝혔다. 트위터에는 “위대한 기관의 헌신적인 직원들을 이끌고 빈곤 없는 세상으로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특권이었다”고 적었다.
그는 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개발도상국 인프라 투자에 초점을 맞춘 민간기업에 합류할 것”이라며 “민간 부문에 참여하는 기회는 예상 못했지만, 글로벌 이슈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길이라고 결론내렸다”고 했다.
김 총재는 미국인이 독점해오던 세계은행 총재직에 아시아계로는 처음으로 오른 인물이다. 하버드대 의대 교수를 거쳐 세계보건기구(WHO) 에이즈국장을 지낸 그는 2009년 미 다트머스대 총장을 지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지명으로 2012년 세계은행 총재로 임명됐다. 미국은 세계은행 지분의 16%를 보유한 최대 주주다. 따라서 세계은행 이사회가 미국이 추천한 후보를 거부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세계은행의 금융정책 전략을 개혁했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오바마 행정부의 지원 아래 2016년 9월 연임에 성공했고, 2017년 7월 두 번째 5년 임기를 시작했다.
김 총재 측근들은 그의 사임이 개인적인 결정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외국 언론들은 트럼프 행정부와의 갈등을 중도하차의 주요 요인으로 꼽는다.
189개 회원국을 둔 세계은행은 세계 빈곤 퇴치와 저개발·개발도상국 재정 지원 등을 맡는 기구다. 하지만 세계은행은 최근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하는 트럼프 행정부와 기후변화, 개도국 지원 등을 놓고 마찰이 적지 않았다고 BBC방송은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파리 기후변화협정 탈퇴를 선언했지만 김 총재는 기후변화 대응 예산을 증액한 것이 대표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세계은행이 중국에 대출을 많이 해준다며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시하기도 했다.
김 총재는 그동안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국제기구 분담금 삭감을 공언하자 딸 이방카 백악관 고문을 통해 예산을 지키는 등 ‘줄타기’를 해왔다. 뉴욕타임스는 김 총재가 트럼프 정부를 달래면서 균형 있게 일을 해왔지만 더 이상 그 괴리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기관 구조조정에 대한 내부의 반발이 있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세계은행은 최고경영자(CEO)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가 직무대행으로 나선다. 하지만 후임 총재 인선 과정은 녹록지 않다. 미국은 관행적으로 세계은행 총재를, 유럽은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를 지명해 왔다. 하지만 세계은행 개도국 회원과 내부 직원들을 중심으로 미국의 총재 선출 전통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개도국 출신 이민자인 김 총재를 세계은행 수장에 임명한 것은 이런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가디언은 “트럼프 행정부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후임 총재를 선택할 경우 큰 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