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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배병우] 을과 을의 전쟁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소상공인연합회 성명에도, 정부의 자영업 살리기 대책으로 카드 수수료 인하 유탄을 맞은 카드업계의 항변에도 이 구절이 어김없이 나온다. ‘을(乙)과 을의 전쟁’이다.

정부가 최저임금을 급격히 올리는 바람에 사회적 약자(을) 간에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아르바이트와 저임노동자뿐 아니라 고용주라고 하지만 한계 상황에 허덕이는 상당수 자영업자와 영세 중소기업도 을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지난해 8월 자영업자들이 솥단지를 던지며 첫 집단시위를 했을 때 “정부가 오히려 을 대 을의 싸움을 부추긴다”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지난해 16.4%에 이어 올해 다시 10.9%가 올라 최저 시급이 8350원이 되자 다시 이 말이 회자되고 있다. 약자를 돕겠다는 정책이 오히려 약자 간의 싸움만 조장하는 역설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아르바이트 시장이다.

주휴수당 쇼크까지 겹치면서 괜찮은 알바 자리가 급감했다. 특히 주당 15시간 넘게 일을 시키면 주휴수당을 줘야 한다는 사실이 ‘공식화’되면서 괜찮은 일자리 품귀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업주들이 주휴수당을 피하기 위해 ‘쪼개기’ 알바 자리를 양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무 여건이 좋거나 임금이 높은 이른바 ‘꿀알바’ 자리를 놓고 권리금이 오가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올해 더욱 파장이 커지고 있는 급격한 인건비 상승이 촉발한 경제와 사회 혼란상을 잘 보여주는 키워드가 ‘을 간의 전쟁’이다.

이에 대해 진보단체나 친여 성향 매체들은 보수세력이 최저임금 인상 정책을 공격하기 위한 프레임(frame)으로 이 말을 확산시킨다고 비판한다. 프레임은 현대인들이 정치·사회적 의제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본질과 의미, 사건과 사실 사이의 관계를 정하는 직관적 틀을 말한다. KBS 보도비평 프로그램은 “경제신문 등의 보도행태를 보면 을과 을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며 모든 것을 최저임금 문제로 끌고 간다. 기-승-전-최저임금”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지난해 도매 및 소매업, 숙박 및 음식점업, 사업시설 관리·사업지원업 등 3대 자영업 집중 업종에서 취업자가 18만명이나 급감했다. 소득양극화는 더 악화됐다. 현장과 통계를 보지 않고 프레임을 씌우는 건 여권이 아닌가.

배병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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