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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계 성폭력, 문제 불거질 때마다 대책 내놨지만, “아무런 효과 없었다”

한국 여자 쇼트트랙의 간판 심석희 선수가 4년간 코치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폭로가 한국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선수촌과 빙상장 라커룸에서도 성폭행이 자행됐다는 심 선수의 진술이 나오자 정부와 체육 당국의 관리 소홀 및 허술한 성폭력 방지 대책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다. 심 선수가 지난달 17일 선수들을 상습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조재범 전 국가대표 코치의 재판에 증인으로 나서기 위해 경기 수원지방법원에 출두한 모습. 뉴시스


노태강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은 9일 “이(심석희) 사건은 정부와 체육계가 마련한 모든 대책들이 사실상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며 머리를 숙였다. 체육계 내에서 성폭력 문제가 끊이지 않는 것은 내부의 폐쇄적 집단문화 탓도 있지만 그간 국민 눈높이를 제대로 맞춰오지 못한 정부와 대한체육회 등 체육 당국의 잘못이 더 크다.

먼저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처벌 규정의 허술함을 들 수 있다. 스포츠공정위원회 규정에 따라 ‘원스트라이크 아웃제’를 적용해 왔지만 영구제명의 범위는 강간, 유사강간 및 이에 준하는 성폭력으로 한정돼 있다. 성추행, 성희롱의 경우 경중을 따져 자격정지 기간을 1년 이상~5년 미만, 5년 이상 또는 영구제명으로 나눠놨다. 판단 주체에 따라 자의적 처분 우려가 없지 않은 셈이다. 정부가 이날 영구제명 조치 대상을 성추행 등의 범위로 확대한다고 했지만 경중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을 경우 실효성 논란이 다시 불거질 수 있다.

또 성폭력 관련 징계자에 대한 정보 공유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국내 다른 단체나 해외에서 직무를 계속하는 것을 방치했다는 문제도 있다. 정부는 이날 관련 규정을 정비해 체육단체 간 성폭력 징계정보 공유 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했지만 비슷한 문제는 2년 전에 이미 지적된 바 있다. 2017년 국정감사에서 미성년 대학생 선수를 성폭행하고 강제 추행한 혐의로 영구제명된 지도자가 장애인체육회 지회장으로 활동 중인 사실이 적발된 것이다. 2014년 쇼트트랙 대표팀 코치를 맡았던 지도자가 성폭력 사실이 드러나 영구제명된 후 지도자로 돌아온 경우도 있었다. 해당 지도자는 대한빙상경기연맹의 재심을 통해 복권된 후 지도자 생활을 계속해 논란이 됐다. 심석희 선수를 폭행한 혐의로 영구제명된 조재범 전 코치도 중국 국가대표 코치로 합류하려고 시도한 사실이 알려져 공분을 샀다.

사실관계가 추가로 확인돼야겠지만 국가가 관리하는 체육시설에서 성폭력이 발생했다는 의혹 역시 대한체육회 등의 관리 문제를 지적할 수밖에 없다. 심 선수를 변호하는 법무법인 세종은 전날 한국체대 빙상장 지도자 라커룸, 태릉 및 진천선수촌 빙상장 라커룸 등 국가가 관리하는 시설이 범죄행위 장소에 포함돼 있다고 밝혀 충격을 줬다. 그간 합숙훈련 과정에서 성폭력, 폭력 등에 노출될 수 있다는 지적이 여러 차례 있었음에도 이에 대한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음을 방증한다. 노 차관은 “훈련 시간 이외에는 지도자와 선수가 제3의 공개된 장소에서 접촉하는 방안 등을 고민하겠다”고 말했다.

문제가 불거질 때 문체부와 체육계를 중심으로 실태조사가 이뤄져온 점 역시 문제 해결을 어렵게 했다는 지적이다. 노 차관은 이날 “체육계의 폐쇄적인 구조로 피해자가 용기를 내지 않으면 외부에서 알기 힘든 구조”라고 했지만 그간의 실태조사는 문체부와 체육계 중심으로 이뤄져 모순적인 모습을 보였다. 단적으로 지난해 11월 여자컬링 ‘팀킴’의 폭로 이후 구성된 합동감사반은 문체부, 대한체육회, 경북체육회로 꾸려졌다. 대한체육회가 2년마다 실시한 성폭력 실태조사는 지난해 처음 외부에서 조사를 실시했다. 그전까지는 내부 조사를 실시했지만 지난해 ‘미투(Me Too)운동’이 확산된 뒤 관련 예산을 늘리고 보다 전문적인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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