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 이루려던 한인 청년들, 中 혁명에 휘말려 ‘산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38년 7월부터 2개월가량 청사로 사용했던 중국 광저우 동산구의 동산백원 건물. 젊은 임정 요원들이 이곳을 사무실과 숙소로 사용했다. 동산백원은 당초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1920~30년대 지도와 건물 영상 자료 등을 대조해 찾아냈다. 임시정부는 일제의 폭격이 심해지자 이곳을 떠나 포산을 거쳐 류저우로 옮겨갔다.
 
광저우 기의열사능원 안의 정자 ‘중조인민혈의정’에 세워진 비석. 1927년 광둥 코뮌 당시 희생된 ‘조선 청년 150여명’의 죽음을 기리고 있다.
 
광저우에 있는 황푸군관학교 정문. 광저우총영사관 제공
 
황푸군관학교 한인학생 김근제의 묘비. 광저우총영사관 제공


“나는 17일 링난에서 체포됐다. 우리 조선 동포 50여명과 중국인 20~30명은 결박당한 채 처형당하러 적군 사령부로 끌려갔다. 우리 50여명은 다른 방에 가두어졌다. 나는 포승줄이 풀려 있어 지붕으로 도피했다. 기관총 소리와 함께 조선 동지들의 애처로운 죽음의 절규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박동무 어디 있소’하고 외치는 소리, 어머니를 부르는 나이어린 소년들의 애처로운 비명소리도 들려왔다.”(님 웨일스 ‘아리랑’)

김산(본명 장지락·1905~1938)이 ‘광둥 코뮌’ 당시 참혹한 상황을 생존자 ‘안창’의 증언이라며 전한 내용이다. 안창은 1927년 12월 11일 중국 공산당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가 삼일천하로 끝난 광둥 코뮌 당시 링난대학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광둥 코뮌 당시 7000명가량이 희생됐고, 150~200명의 한인 젊은이들도 산화했다. 그중에는 16~20세의 청년들도 많았다. 나라를 잃고 떠돌던 이들은 중국 대혁명의 물결을 타고 대한독립을 이루려다 목숨을 잃었다.

24년 국공합작부터 27년 초까지 광저우는 대한 독립투사들의 해방구였다. 중국 대혁명 물결에 기대를 건 독립투사들이 조선과 만주, 시베리아에서 몰려들었다. 27년 초에는 그 수가 800명을 넘었다. 이들은 황푸군관학교, 중산대학, 중국 군대 등에 들어가 활동했다. 황푸군관학교에는 명단이 확인된 한인 학생만 73명이고, 분교까지 포함하면 200명이 넘었다. 김산은 “일본에서 노동운동 지도자가 20명가량, 만주의 독립군 약 400명이 의용병으로 왔다. 러시아에서 100명 이상, 국내에서도 100명이 왔다”고 회고했다.

약산 김원봉 선생도 한때 광저우에 둥지를 틀었다. 약산은 의열단원 12명과 함께 26년 1월 황푸군관학교 제4기로 입교했다. 약산은 한때 상하이 시절 의열단원들과 겨우 국수로 끼니를 때울 만큼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국공합작이 되면서 광둥 정부가 약산에게 함께 ‘항일작전’을 하자고 제안해 광저우로 본부를 옮겼다. 당시 광저우에 있던 의열단원은 60명 정도였다.

그러나 27년 4월 국공합작이 깨지자 좌우익 관계없이 혁명과 독립의 희망을 품고 왔던 한인들은 극도로 혼란에 빠졌다. 한인 단체들이 흩어지면서 한인 상당수는 만주나 고국으로 돌아갔다. 약산도 그해 5월 광저우를 떠난다. 이후 사회주의 계열의 한인 젊은이 200여명이 광저우에서 광둥 코뮌에 참여했다가 대부분 짧은 생을 마감했다.

앞서 황푸군관학교에서 학생으로 교육을 받던 중 전투에 투입됐다가 희생된 학생들도 있었다. 광저우 동정진망열사묘원 한쪽에 평안북도 정주군 출신 김근제, 충북 괴산 출신 안태 선생 묘가 그 시절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김근제 선생은 후손 김기용씨가 다녀갔지만 안태 선생은 후손을 찾지 했다.

지난달 조선인 150여명의 죽음을 기리는 광저우 기의열사능원을 찾았다. 능원 한편에 ‘중조인민혈의정’이란 정자가 우뚝 서 있었다. 정자 안의 비석에는 ‘조선 청년 150여명이 중국 전우들과 함께 싸웠고, 최후에 사허 전투에서 진지를 사수하다 대부분 희생됐다’는 내용이 있었다. 광둥 지역 독립운동 역사에 천착하는 역사학자 강정애씨는 “당시는 한반도가 남북이란 개념도 없었고, 사회주의 계열 독립투사들도 오직 광복을 위해 투쟁했던 분들인데 좌익 딱지가 붙어 한국 현대사에서 잊혀졌다”며 “그분들이 왜 여기까지 와서 죽어갔는지는 우리 후손들이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임시정부도 38년 7월 광저우로 가 2개월간 머물렀다. 임시정부는 23년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 3차 대회를 했던 곳에서 가까운 동산백원에 청사를 마련했다. 동산백원은 임시정부의 젊은 요원 10여명이 사무실과 숙소로 쓰고, 임정 가족들은 근처 아세아여관에서 살았다. 이 지역은 돈과 권세가 있는 사람들이 거주해 치안이 좋던 곳으로 20년대에 황푸군관학교에 근무했던 한인들도 이쪽에 살았다. 백범 김구 선생이 창사에서 광저우로 피란 올 때는 채원개 장군이 자동차로 나가 영접하기도 했다.

동산백원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한때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광저우 총영사관이 광저우시 정부, 독립기념관 등과 함께 각종 자료를 찾아 대조한 끝에 동산백원이 현존한다는 사실을 최초로 확인했다. 그러나 동산백원은 건물 입구에 빨래가 어지럽게 널려 있고, 관리상태도 좋지 않아보였다. 임시정부 건물은 현재 일반 중국인들이 거주하고 있는데 소유권을 중국 개인과 기관이 보유하고 있어 중국 정부 및 국내 관계 부처와 향후 보존방안을 협의해 나갈 것이라고 광저우 총영사관 측은 설명했다. 임시정부는 광저우에서 두 달 머물다 인근 포산으로 옮겼으나 일본의 공습이 심해지자 다시 류저우로 떠났다.

동산백원 바로 옆에는 죽원이란 문패가 새겨진 건물이 있었다. 그 집은 한국독립당 김붕준 선생이 집안에 태극기와 흥사단 당기를 걸어놓고 활동했던 곳이라고 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상하이 조계지 내 이유필 선생 집에서 체포됐는데, 그때 바로 옆집에 살던 김 선생은 집안의 중요 서류를 불태우고 광저우로 도피해 죽원에서 지냈다. 죽원은 32년 상하이에서 독립투사인 박의일 선생이 밀정을 처단한 뒤 숨어 있던 곳이기도 하다.

박 선생은 죽원을 덮친 일본 경찰에 체포돼 “나는 일본의 신민이 아니고 중국 국적자”라고 버티다 단식 끝에 풀려났다. 광저우에는 우리 독립운동 역사에서 감춰져 있던 독립투사들의 열정과 울분, 피눈물이 곳곳에 서려 있었다.

광저우=글·사진 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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