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수도였던 충칭은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정부에 막다른 벼랑이었다. 충칭까지 일본군에 밀린다면 뒤로는 티베트 고원이었다. 더 물러설 곳도 없었다. 나라를 잃고 중국에 기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처지도 마찬가지였다. 배수진을 친 우리 독립운동 진영은 임시정부 깃발 아래 처음으로 통합을 이뤄냈다. 이후 광복군을 창설해 국내 진공 훈련까지 마쳤지만 일본이 패망하면서 외세의 힘으로 해방을 맞아야 했다.
충칭 피난길은 험난했다. 1938년 7월 창사를 떠나 광저우에 도착한 임시정부는 일본군의 공습이 심해지자 인근 포산으로 피했다가 10월 중순 다시 류저우로 떠난다. 일행을 태운 기차는 기관총 소리를 들으며 한밤중 포산을 떠났다. 싼수이에선 배를 타고 주장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꼬박 40일간 배 위에서 보내고 류저우에 도착했다. 이어 39년 4월 다시 버스를 타고 거친 산길을 넘어 쓰촨성 치장으로 옮겨갔다. 치장에서는 임시정부 청사와 국무위원 숙소, 100여명 임정 가족들의 거주지를 마련해 1년 반 정도 머물렀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흔적은 사라지고 석오 이동녕 선생이 살았던 집만 남아 있었다.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였던 석오 선생은 40년 3월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석오는 치장 청사에서 열린 3·1절 기념식 후 “오랜만에 놀러 나온김에 밖에서 저녁을 먹자”고 제안해 함께 국수를 먹었다. 그게 석오의 마지막 나들이였다. 얼마 후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도 눈을 감았다.
석오의 집은 장강 지류인 치장허 강가에 있었다. 재개발로 철거될 뻔하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고 반쯤 무너진 벽에 기댄 채 덩그라니 남아 있었다. 집 벽에는 ‘2000년 6월 20일’이라고 쓰인 낡은 표지판이 석오의 생가임을 알려줬다.
임시정부는 40년 9월 다시 충칭으로 옮겨갔다. 임정 가족들은 41년 투차오(土橋)로 이사했다. 투차오의 한 구역을 매입해 기와집 3동을 짓고 도로변에 2층 기와집 1동을 매입해 100여 식구가 머물렀다.
임정 가족들이 5년간 살았던 투차오 마을은 폐쇄된 강철 공장 안에 있었다. 강철 공장은 큰 도로에서 꽤 떨어져 있었다. 임정 가족들의 집터엔 ‘한인 거주 옛터’라는 표지석에 꽃다발 몇개와 태극기가 놓여 있었다. 집터에는 잡초가 무성했고, 주변에는 녹슨 철근들이 쌓여 있는 창고와 빈 건물이 곳곳에 있어 음산했다.
충칭 임시정부는 분열을 끝내고 민족 단합을 이뤄냈다. 40년 5월 민족주의 계열의 3당이 한국독립당으로 통합했고, 43년 10월에는 좌우익이 대부분 참여한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한국 독립운동사의 오랜 숙원이었던 통합 정부가 마침내 탄생한 것이다.
광복군도 창설해 우리의 군대를 갖게 됐다. 40년 9월 17일 충칭 자링빈관에선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이 열렸다. 총사령은 이청천, 참모장은 이범석이었다. 이어 42년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합류하면서 총사령관 이청천, 제1지대장 김원봉, 제2지대장 이범석, 제3지대장 김학규로 위용이 갖춰졌다. 충칭 광복군 총사령부가 있던 자리는 지상 3층, 지하 1층 규모로 복원공사가 한창이었다. 원래 사령부는 옛 건물의 지하 1층만 사용했는데 복원 규모는 상당히 컸다. 당초 부동산 개발업체가 옆에 들어선 큰 빌딩과 함께 개발을 추진했으나 중국 당국이 이를 중단시키고 유적을 복원토록 했다고 한다.
45년 1월 31일에는 청년 50여명이 애국가를 부르며 충칭의 임시정부 옌화츠 청사로 들어섰다. 장준하 김준엽 등 일본군 부대를 탈주한 학도병들이 안후이성 푸양에서 7개월간 2500㎞를 걸어 임시정부를 찾아온 것이다. 이들은 “부모님은 우리 독립정부가 충칭에 있으니 왜군 앞잡이로 개죽음 당하지 말고 영광스러운 죽음을 택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학도병들의 귀환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광복군은 미국 전략사무국(OSS)과 함께 3개월간 비밀훈련을 마치고 대원들을 조선으로 밀파해 파괴와 정탐 등 공작을 개시할 준비를 했다. 백범은 시안의 비밀훈련소에서 대원들의 훈련 장면을 보고 이틀 후 산시성 주석과 저녁을 먹었다. 대화 도중 전화벨 소리가 울리더니 “왜적이 항복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백범은 “내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동안 애써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며 회고했다.
백범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북한에서는 김일성과 김책 등이 소련군과 함께 9월 초 입북했고, 10월 16일 이승만 선생이 미국에서 귀국했다. 그러나 미 군정은 임시정부에 냉소적이었다. 백범과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한 것은 11월 23일이었다.
미 군정은 이들의 귀국을 허용하면서 인원을 10여명으로 제한했고, 임시정부 요인이 아니라 개인 자격이라고 못박았다. 미 군정은 북위 38도선 이남은 미국의 군정을 받는 사실을 인정하며, 군정이 끝날 때까지 정부로서 행사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도 요구했다. 하루속히 조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처지여서 서약서에 동의했다. 백범은 11월 5일 충칭을 떠나 상하이에서 20여일 머물다 서울에 도착했다.
충칭에 남은 임정 가족 100여명도 길고 서글픈 귀국길에 올랐다. 투차오에 있던 임정 가족은 46년 1월 하순 버스와 배, 기차를 번갈아 타고 2월 19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이어 5월 초 상하이 부두에서 미군이 제공한 수송선을 탔다. 정정화 선생은 “우리는 난민이었고 거지떼였다. 수송선은 난민수송선이었다. 난민선은 가축 수송선이나 다름 없었다”고 돌이켰다. 우강 최석순 선생의 맏딸 동선도 김원봉과 결혼해 낳은 돌도 안 된 아기를 업은 채 배에 타고 있었다.
난민선은 상하이 출발 3일 만에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서도 미 군정이 콜레라 환자 확인을 이유로 상륙시키지 않아 배 위에서 사흘을 더 보냈다. 이어 방역과 통관을 위해 난민수용소에 들어갔다가 부산역에서 화물열차를 타고 서울로 갔다. 27년간 임시정부를 지키며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치고 싸웠지만 정작 해방된 조국은 그렇게 차갑게 맞이했다.
충칭=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