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은 시대다] 요절한 뮤지션의 목 쉰 포효 역사상 가장 성공한 유작으로


 
가수 김현식은 ‘사랑했어요’ ‘비처럼 음악처럼’ 등을 히트시키며 1980년대 후반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간경화로 90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뉴시스
 
별세 이듬해인 91년 출시된 그의 유작 음반 재킷. 뉴시스


소비에트연방(소련)의 몰락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던 1991년, 한국에서는 악화되는 경제 사정과 제도 정치권에 대한 염증이 점점 더 심해지는 가운데 한 대중음악가의 목쉰 음성이 요절이라는 베일에 싸여 거세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인기의 지속 기간이 1~2주일을 채 견뎌내지 못하는 대중음악 시장에서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는 모든 비공식 차트를 반년 이상 석권했다. 방송사들은 그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담긴 필름을 찾기 위해 온 창고를 뒤지는 부산을 떨었다.

김현식, 언더그라운드의 신화

‘얼굴 없는 가수’였던 김현식은 순식간에 언더그라운드 대중음악의 신화가 됐다. 10년에 걸쳐 발매된 6개에 이르는 그의 정규 앨범은 신화의 열광적인 지지자들에 의해 이례적인 판매고를 기록하기 시작했고, 마지막이 된 여섯 번째 앨범 판매량은 100만장을 훌쩍 뛰어넘어 ‘더블 밀리언(200만장)’이라는 상상도 못할 수치에 거의 근접했다. 김현식은 한국에서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대중적 승인을 결정짓는 구두점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한국형 비주류’ 음악 문화의 본질에 대해 단답형으로 대답할 수 있는 논리를 내놓지 못했다. 하지만 김현식이 분만한 일련의 상황이 19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이 엄청나게 외연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은 분명했다. 그가 몸담았던 동아기획의 기획능력이 주류 네트워크가 지배하던 생산·소비의 패턴을 우아하게 조롱했다는 것도 주목할 만했다.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가 80년 광주의 비극으로 암담했던 한국사회를 위안할 때 슬며시 발표된 김현식의 데뷔 앨범을 주목한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5년 뒤 그의 두 번째 앨범이 나왔을 때, 김현식은 언더그라운드의 동의어가 될 채비를 완료했다.

들국화가 언더그라운드 신화의 기폭제였다면 김현식은 이 신화의 완성자였다. 그리고 빨리 찾아온 그의 죽음은 바로 그 폭풍을 마감하는 구두점이었다. 그가 한국 대중음악사에 아로새긴 의미의 자장은 실로 만만치 않다. 주목받지 못했던 80년의 데뷔 앨범은 같은 해 나온 조용필 1집과 여러모로 대비된다. 다소 과도기적이며, 따라서 전반적인 완성도가 미흡한 이 앨범은 80년대 가요계가 록 발라드의 시대가 될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예언의 보상은 무려 5년 뒤에나 실현된다. 85년과 86년에 연이어 나와 성공을 거둔 2,3집이야말로 록 발라드의 진수들로 구성돼 있었다. 특히 ‘어둠 그 별빛’과 ‘비처럼 음악처럼’, 그리고 유재하가 제공한 ‘가리워진 길’은 언더그라운드 록 발라드의 전범이 됐다.

김현식의 가장 큰 공적은 보컬리스트로서 서구 대중음악의 대표적인 장르 대부분을 정면돌파해버린 데 있다. 그는 70년대의 유산인 포크를 일찌감치 포기한 대신 발라드부터 고전적인 댄스뮤직, 퓨전 음악에 이르기까지 자유자재의 소화력을 과시했다. 바로 이 소화력이 그를 언더그라운드 음악가들의 집결장이 되게 했다. 약 11년에 걸친 그의 활동 기간은 한국 언더그라운드의 역사였다.

그의 초기 앨범 프로듀서는 70년대 중반을 빛냈던 그룹 사랑과 평화의 리더 김명곤이었다. 3집 앨범은 봄여름가을겨울(퓨전 록의 제왕으로 떠오른 이 신선한 그룹이 그의 백밴드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대중음악사에 기록될 것이다)이, 4집 이후에는 수많은 세션맨들과 송홍섭이 음반 제작을 거들었다.

하지만 그의 동반자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아마 유재하일 것이다. 87년 단 한 장의 앨범을 내고 교통사고로 사망한 유재하는 언더그라운드 내부의 정점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한양대 작곡과 출신인 그는 진정한 의미의 싱어송라이터이자 가장 감각적이고 과학적인 편곡의 지평을 연 인물이다. 그의 데뷔 앨범이자 백조의 노래가 된 유작은 한국 대중음악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인지를 가리켰다. 이 앨범에 이르러 한국 대중음악에서 연주 부분이 단순한 반주가 아니라 독립적인 음악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 됐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로 구성된 현악에 유재하 자신이 피아노와 기타를 맡고 조원익이 베이스를, 유영수가 드럼을 맡았는데, 이를 통해 유재하는 그야말로 혼연일체의 투명한 음악을 만들어냈다.

반면 김현식을 떠올릴 때 가장 아쉬운 대목은 그가 뛰어난 싱어송라이터는 아니었다는 데 있다. 데뷔 앨범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제외하면 그의 작곡 능력은 2류에 머물기도 어려운 수준이었다. 록 음악가로서 치명적인 이러한 약점은 그의 탁월한 백밴드 봄여름가을겨울과 송홍섭을 위시한 베테랑 음악감독들이 메꿔 주었다.

사랑의 소외를 노래하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는 마지막 앨범에 이르러 김현식은 짧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던 자신의 삶을 일필휘지로 그려냈다. 시계의 초침 소리가 임박한 임종을 암시하는 가운데 흐르는 짧은 독백과 한 호흡으로 제시되는 주제 선율, 그리고 박청귀의 일렉트릭 기타와 여기에 호응하며 포효하듯이 일어서는 후렴의 사자후…. 봄여름가을겨울의 일원이었고, 나중에 빛과 소금이라는 밴드로 독립해 나간 박성식이 제공한 ‘내 사랑 내 곁에’를 통해 김현식의 날개는 많은 이의 감관(感官)을 휘감았다.

그는 ‘어둠 그 별빛’이나 ‘비처럼 음악처럼’같은 대표적인 곡에서 드러나듯 블루스에 기반한 슬로 템포의 곡들을 통해 록의 비경을 보여줬다. 그는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소리꾼의 힘과 기교를 갖추고 있었으며, 특유의 카리스마는 수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어냈다.

김현식이 우리에게 각인됐던 그 시대는 랩을 제외한 서구의 음악 문법이 우리 대중음악의 골간을 장악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하지만 그는 서구 사조의 수입상에 머물지 않았다. 음악에 우리의 숨결을 불어넣고자 했다. 네 번째 앨범의 ‘우리네 인생’이나 유작의 ‘도시의 밤’과 같은 전형적인 로큰롤에 면면히 흐르는, 무어라 규명할 수 없는 ‘향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향기 없는 꽃’에서 이렇게 읊조렸다. ‘겉이 화려할수록 진실 메말라 있고/ 겉이 화려할수록 향기 간 곳 없으니/ 향기 없는 꽃이여/ 그대의 진실은 은밀함에 있어/ 부러움 한몸에 받을 수 있다오….’

91년에서 92년 상반기까지 이어진 ‘내 사랑 내 곁에’의 전설적인 히트는 언더그라운드의 승리를 확인시키는 결정타였지만 동시에 퇴조의 신호탄이기도 하다. 봄여름가을겨울과 팝 발라드 그룹 푸른하늘 정도의 분전을 제외하면 막강 화력을 자랑했던 동아기획은 이후 급격히 몰락했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혼재돼 있을 것이다. 첫째로, 6년여의 언더그라운드 폭풍기가 지속되면서 언더그라운드 자체의 신선함은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92년 상반기를 기점으로 랩 음악이 서태지에 의해 격발되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김현식, 그는 생전에 누려보지 못한 대중적 명성을 죽고 난 뒤에야 비로소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자기 맘대로 살다간 사람이다. 마음에 들지 않은 기자를 패버리기도 했고, 마약으로 감옥신세를 지기도 했었다. 그리고 급기야 술을 마시며 자신을 망가뜨렸다. 이 같은 자기 학대는 소외의 몸부림이었다. 그가 생각했던 소외는 계급적인 소외가 아니라 사랑의 소외였다. 김현식은 ‘질서’를 요구하는 세상에 참을 수 없는 반감을 드러냈다. 대부분의 노래는 사랑에 관한 것들이었지만 그것들은 거의 예외 없이 사랑의 기쁨이나 아름다움, 행복에 대해서가 아니라 좌절 이후의 고독과 상처의 쓰라림을 담고 있었다.

당연히도 그는 온갖 규제로 가득찬 TV 무대를 혐오했으며, 언더그라운드의 라이브 공간만을 자신의 터로 생각했다. 그는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기 위한 그 어떤 눈속임이나 사소한 기교도 거부했다. 오로지 라이브 무대의 응축된 긴장감만을 ‘생명’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들국화와 함께 TV나 라디오 같은 전파매체의 도움을 얻지 않고도 대중음악의 독자적인 존립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현실화시킨 주역이었다.

<강헌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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