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군.’
중국 대륙을 떠돌며 조국 광복을 위해 싸우던 독립투사들이 조직한 군대. 독립에 대한 열망은 하나였지만 당시 급박하고 복잡한 상황은 두 군대를 각자 다른 길로 이끌었다. 분단된 조국에서는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도 겪었다.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은 뿌리가 얽혀 있다. 1919년 11월 의열단을 결성한 약산 김원봉은 38년 10월 후베이성 우한에서 조선의용대를 발족한다. 그러나 우한이 일본군에 밀리자 조선의용대 본부는 광시성 구이린에 이어 39년 말 충칭으로 옮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한다. 41년 1월 김원봉의 동지 윤세주가 조선의용대 대원들을 이끌고 타이항산으로 떠난다. 김원봉은 충칭에 남았다. 타이항산 조선의용대는 42년 5월 윤세주가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하면서 충칭 본대와 멀어졌다. 김원봉은 42년 충칭의 조선의용군 본대를 광복군에 통합하고 부사령 겸 제1지대장을 맡게 됐다. 곧이어 타이항산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면서 완전히 갈라졌다.
광복 후 북으로 간 조선의용군은 ‘옌안파’로 불렸고, 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숙청을 당하거나 중국으로 쫓겨났다. 주시경의 제자로 한글 학자이자 연안파의 거두였던 김두봉도 58년 숙청당해 오지에서 생을 마감한다.
김원봉은 남한에서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돼 ‘빨갱이 두목’이란 누명으로 뺨을 맞고 고문을 당한 뒤 통곡을 했다. 친일파와 우익의 테러 위협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48년 남북협상 때 북한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다. 58년 옌안파 숙청 때 이름이 사라져 남북에서 잊혀졌다.
중국 산시성 시안과 옌안에는 우리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의 숨결이 곳곳에 남아있다. 시안과 옌안은 고속철도로 2시간이 넘지만 중국 대륙에선 지척의 거리다.
지난 20일 시안 외곽의 두취(杜曲)진에 있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 주둔지를 찾았다. 길가에 2014년 4월 건립된 광복군 제2지대 표지석 기념공원이 보였다. 표지석에는 “1942년 9월 한국광복군 제2지대는 항일투쟁이 격렬하게 진행됨에 따라 서안시 두곡진으로 이전해 군사훈련과 대일전선 임무를 담당했다”고 적혀 있었다.
기념공원 문지기는 한인의 후손이 맡고 있었다. 자오성린씨는 올해 74세(호적상 1947년생)로 아버지는 한국인, 어머니는 중국인이라고 했다. 그의 안내로 근처 이범석 지대장의 관사를 찾아갔다. 관사 자리에는 다세대 주택이 들어서 있었다. 한 주민이 이범석 관사에 있던 감나무가 지금도 살아있다며 안으로 안내했다. 굵은 감나무가 주택 3층 지붕까지 뻗어있었다. 감나무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건물을 지은 구조였다. 골목 건너편에는 오래된 양곡창 주택이 남아있었다.
다시 차로 20분쯤 남쪽으로 내려가자 중난산 자락에 미터구사(彌陀古寺)라는 고찰이 보였다. 미터구사 뒤편은 가파른 산과 깊은 계곡이었다. 한국광복군이 미국 전략첩보부대(OSS)와 국내 진공계획 ‘독수리작전’을 위해 훈련했던 곳이다. 일본군을 탈출해 충칭 임시정부로 찾아온 장준하, 김준엽 등 학병 출신 19명과 광복군 2지대 대원 31명 등 총 50명이 훈련을 받았다.
국내 진공작전을 앞두고 마지막 훈련을 참관한 백범 김구 선생은 이렇게 회고했다. “청년 7명이 하나뿐인 밧줄에 매듭을 지어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가 나뭇잎 하나씩 입에 물고 올라왔다. 미 교관은 ‘내가 중국 학생 400명을 시험할 때도 발견하지 못한 해답을 귀국 청년 7명에게서 찾아냈소. 앞날이 촉망되는 국민이오’라고 했다.”
시안에서 고속철도로 2시간20분쯤 걸리는 옌안으로 갔다. 먼저 조선의용군이 머물렀던 촨커우촌(川口村)을 찾았다. 44년 1월 타이항산을 떠난 조선의용군이 2000여리를 행군해 4월 7일 도착해 주둔한 곳이다. 이들은 촨커우촌에서 황토를 파서 만든 야오둥(窯洞·산속토굴집)에서 지냈다.
촨커우촌 입구에 ‘조선의용군 유적’ 기념비가 있었고, 조금 떨어진 산자락에는 당시 의용군이 사용한 우물이 2개 있었다. 아래쪽 우물은 깨끗하게 관리돼 바로 먹어도 될 정도로 맑아보였다. 옆에는 지난해 4월 세워진 안내석 4개가 당시 조선의용군과 지방정부, 의약학교 등이 있었음을 알려줬다. 그 뒤 산에는 야오둥이 여러 채 복원돼 있었다. 조만간 조선의용군 표지와 함께 물품들이 전시될 것으로 보인다.
촨커우촌에서 승용차로 15분 정도 떨어진 뤄자핑 입구에는 지난해 4월 세워진 ‘조선혁명군정학교’(조선의용군의 군사간부 양성교육기관) 표지석이 있었다. 바로 뒤에는 96년 7월 건립된 조선혁명군정학교 기념비가 있었다. 기념비에는 “조선혁명군정학교는 42년 11월 타이항산에 설립됐다. 촨커우촌에 도착한 조선의용군이 뤄자핑에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세워 (45년) 2월 5일 성대한 개학식을 열었다. 교장은 백연(김두봉)이고 부교장은 박일우였다”고 적혀 있었다.
조선혁명군정학교는 학생 240여명과 교관 및 지원인력 40여명 등 280여명으로 적지 않은 인원이었다. 뤄자핑은 좁고 구불구불한 자갈길에 허름한 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촌락이었다. 군정학교는 당시 교사 2동과 강당 1동, 숙소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숙소 야오둥만 완전히 무너진 상태로 남아있다고 마을 주민들은 전했다.
비운의 혁명가 김산이 37년 님 웨일스와 인터뷰할 때 있었던 중국항일군정대학은 국민당군의 포격으로 파괴됐다가 기념관으로 복원돼 있다. 김산은 당시 일본경제와 물리, 화학을 강의했고, 조선의용군 30여명이 여기서 교육을 받았다. 옌안에는 중국 팔로군행진곡과 예안송 등을 작곡한 천재 작곡가 정율성이 음악을 배웠던 루쉰예술문학원도 새로 단장돼 있었다.
조선의용군은 남북에서 잊혀졌지만 중국은 타이항산과 옌안 등 곳곳에 기념비를 세우고 그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은 올해 그들이 목숨 바쳐 항일투쟁했던 기록만이라도 우리 역사로 명예회복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시안·옌안=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