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이후 당대까지 한국 사회에서 사람이란 오직 남자를 뜻하는 것이었음에도….”
지난해 말 출간된 ‘한국, 남자’(최태섭 지음)에는 우리 사회에서 남성을 이렇게 규정하는 대목이 나온다. 가부장제 아래에서 남성은 그 자체가 온전한 세계였다. 세상의 반쪽으로서의 남자를 다룬 책은 드물었다.
미술계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남자를 세상의 반쪽으로 내세운 미술 작품은 내 기억에는 없다. 무수한 남자들이 등장하긴 했다. 그러나 그들은 민족 해방의 리더였고, 민중 운동의 중심에 있었고, 신자유주의에 무너져 내리는 노동자였다. 한마디로 ‘한국 사람’의 대명사였다.
그러므로 서울 관악구 서울대미술관에서 11명의 여성 작가를 초청해 여는 ‘여성의 일’전(2월 24일까지)에서 고등어(35·사진) 작가의 작품은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매 맞는 여성, 여성의 성적 판타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제 이름으로 불려보지 못한 이 땅의 할머니 등 사회의 소수자로서의 여성을 이야기하는 페미니즘 전시에 고등어 작가는 남자를 그려 내놓았기 때문이다.
고등어 작가의 ‘엷은 밤’ 연작 12점은 내면의 풍경을 그린 것 같은 A3용지 크기의 흑백 연필 소묘다. 말 그대로 희부연 밤, 한 남자가 자신의 분신 같은 석상을 메고 여정을 떠난다. 남자는 집처럼 생긴 입방체 앞에 섰다. 그를 거부하는 듯 출입구도 없는 입방체에서 팔 하나가 삐죽 나와 남자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이것은 위로일까, 그의 집착일까.
또 다른 장면에서 남자는 석상을 등에 메단 채 목이 잘린 두상에 대고 뭐라고 속삭인다. 좌대 위에 올려져 기념비처럼 추앙받는 운명이 되지 못한 채 깨어져 나뒹구는 석상을 그린 장면도 있다. 등에 멘 석상이 어디서 굴러왔는지 암시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고등어의 작품은 사회의 주류에 진입하지 못하는 남성을 상징하는 것일까.
최태섭에 따르면, 역사 이래 한국의 남성들은 수혜자였다. 그런데도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2000년대 들어 남성이 오히려 피해자라는 적반하장의 담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른바 ‘불쌍한 남자론’이다. 이 석상은 신자유주의 시대, 남자로 살아가는 것의 버거움을 말하는 항변으로 비칠 수 있다. 석상 자체를 버려야 할 구시대적 가치관이라고 볼 수 있다. 여러 알레고리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 속에는 어쩌다 남성이 들어앉게 됐을까. 최근 서울대미술관에서 작가를 만났다. 그녀는 한국 미술판에선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대학을 중퇴했지만, 미술 전공은 아니었다. 대학 1학년 때 청소년 직업체험센터인 하자센터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모두 ‘정어리’ ‘팔뚝’ ‘괭이’ 등의 별명을 사용했다. 그때 사용한 별명 ‘고등어’가 작가명이 됐다.
화가가 될 생각은 없었다. 식이장애가 있어 미술 치료를 위해 그림을 그린 게 계기가 됐다. 혼자 색연필로 끄적거렸던 그림을 블로그에 올렸는데, 그걸 본 어느 갤러리 대표가 전시를 제안했다. 2007년의 일이다. 미술대학도 나오지 않은 아마추어가 23세 때 난생처음 개인전을 연 것이다. 그 전시를 본 국립현대미술관의 큐레이터가 2008년 국립현대미술관 ‘젊은 모색’전에 과감히 그녀를 캐스팅했다. 이 기획전은 한국의 유망주를 모아놓는 최고의 작가 등용문으로 통한다.
“로또 맞은 기분이었지요. 그림 그린 지 1년도 안 됐는데….”
기성의 미술 문법을 따르지 않는 고등어의 작품 세계는 확실히 차별점이 있다. 기성작가는 거들떠보지 않는 재료인 색연필이나 연필을 사용한 것이 오히려 특장점이 됐다. 관통하는 주제인 신체에 관한 관심도 예리하다.
“제가 겪은 식이장애가 무리한 다이어트에서 비롯된 거예요. 사회에서 보는 눈에 제 신체를 정형화하려 했기 때문이지요.”
이런 자각이 개인적 풍경에서 사회적 풍경으로서의 신체로 관심 영역을 확장했다. ‘웨이트리스 생존의 풍경’은 아르바이트를 하던 카페에서 여성의 비정규직 노동을 주제로 연 개인전이었고,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 만든 플립 북 ‘바로크 포르노’는 여성이 성적 관계에서 얼마나 주체적으로 될 수 있을까를 묻는다. ‘몸부림’은 용산 참사, 밀양 송전탑 시위에 동원된 철거 용역 남성들을 그렸다.
작가의 관심은 자본주의하의 신체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에 있다. 그 끝자락이 남성으로 향하는 것은 예고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국 시스템이 남성 중심적이잖아요. 저한테는 가장 타자가 남자였습니다.”
작가는 남자가 멘 석상을 두고 “한때는 권력을 가졌고, 그 권력을 이어가고 싶은 남자가 자신이 가장 만족스러웠을 때의 이미지를 끌고 가는 것 같다”며 조심스레 말했다. 서울대미술관 측은 고등어의 작품에 대해 “남성의 욕망을 관찰하고 이를 타자화하며, 냉소적이지만 연민을 가지고 바라보는 여성의 시선을 부각한다”고 적고 있다. 남자에 대한 관심이 페미니즘에서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석상을 멘 ‘한국, 남자’는 어디로 가야 할까.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