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2015년 펴낸 회고록에서 “1979년 박정희 장군과의 회담이 재임 기간 동맹국 지도자들과의 회담 중 가장 불쾌한 토론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박정희 대통령을 ‘장군(General)’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36년이 흐른 뒤에도 불쾌감은 가시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박정희는 대통령이 아니라 군부 지도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카터 대통령이 언급했던 ‘불쾌한’ 회담은 79년 6월 30일 청와대에서 열렸다. 역사상 ‘최악의 한·미 정상회담’으로 평가되는 회담이었다. 당시 카터는 주한미군 감축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그 이유로 베트남전쟁 후유증을 꼽고 있다. 미국의 아시아에 대한 군사개입 축소의 상징적 조치로 주한미군 감축을 꺼내들었다는 설명이다. 카터는 유신 반대세력을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었던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감축할 수 있다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이 회담을 기록한 당시 백악관의 기밀해제 문서를 보면 한·미 당국자들은 주한미군 감축·철수 문제로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두 정상이 싸우지나 않으면 다행이라는 걱정을 안고 있었다. 박정희는 작정한 듯 난타전을 시작했다. 그는 회담이 시작되자마자 주한미군 감축 반대 주장을 45분이나 펼쳤다. 카터가 배석했던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과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에게 ‘박정희가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한국에서 미군을 전원 철수시키고 말겠소’라는 쪽지를 건넨 것은 유명한 일화다.
카터는 박정희 면전에서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라”고 요구했다. 또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군사원조를 받으면서도 당시 한국군 병력 60만명의 0.5%에 불과한 주한미군 3000명(실제로는 3400명)을 빼는 방안에 겁먹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비꼬았다. 박정희는 북한 위협을 거론하면서 “소련군이 땅굴들을 파고 워싱턴에 특공대를 투입한다면 미 국민들의 자유는 제한받을 것”이라며 긴급조치 9호 해제를 거부했다. 이어 “미국의 오판으로 전쟁이 일어난다면 미국의 군사적·정치적 비용과 희생은 엄청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 계획은 결국 무산됐다. 박정희의 ‘개인기’ 때문이 아니었다. 미 군부와 의회의 반대가 컸다. 주한미군사령부에 근무했던 존 싱글러브 소장은 “미군이 철수하면 북한이 또 남침할 것”이라고 항명했다. 카터는 회고록에서 “당시 북한의 군사력이 배로 증강됐다는 국방부 정보부서의 보고서가 나온 뒤 의회가 주한미군 철수 반대로 돌아섰다”고 회상했다. 결정타는 카터 자신의 80년 대선 패배였다.
블룸버그통신은 79년 ‘박정희·카터 회담’ 이후로 40년 만에 주한미군 감축·철수 문제가 한·미 간 갈등 이슈로 부상했다고 보도했다. 현재 한·미는 주한미군 분담금을 놓고 기싸움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속을 짚어보면 40년 전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카터는 미국 역사상 유약했던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예측불허로 따지면 단연 독보적인 대통령이다. 게다가 한국의 분담금 인상이 없으면 주한미군 감축·철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트럼프의 오래된 소신이다. 그는 대선 후보 시절부터 “한국이 방위비를 올리지 않으면 스스로 방어하게 될 것”이라는 말폭탄을 던졌다.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 부국장이 쓴 책 ‘공포’에서 트럼프에게 주한미군 존재 이유는 “3차 세계대전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던 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장관도 떠났다.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가 우발적으로 주한미군 감축을 주장할 수도 있다는 우려는 끊이지 않는다. 미 언론들은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정은을 믿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 우리는 과연 트럼프를 믿을 수 있을까. 주한미군 문제와 관련해선 문재인정부가 분명한 입장을 취해야 할 때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