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밤 암 투병 끝에 93세의 나이로 별세한 고(故)김복동 할머니의 삶은 일본 위안부 피해자에서 여성인권운동가로 거듭나는 시간이었다.
김 할머니는 1940년 14세 때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이후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일본군의 전쟁터를 따라 다니며 고초를 겪었다. 싱가포르의 한 병원에서 일본군을 간호하기도 했다.
위안부로 끌려간 지 8년이 지난 22세에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가던 그는 92년 위안부 피해 사실을 외부에 알렸다. 이때 할머니 나이는 66세였다.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은 “남들은 은퇴하는 나이에 김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신고했다”고 기억했다. 93년엔 유엔인권위원회에 참석해 처음으로 위안부 피해 사실을 세계에 알렸다. 2000년에는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 법정’에 원고로 출석해 실상을 문서로 증언했다.
김 할머니는 자신의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것을 넘어 전시 성폭력 피해자 지원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다. 2010년에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함께 전시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나비기금을 설립했다. 2012년부터 5년 간 매년 유엔인권이사회, 미국, 영국, 독일, 노르웨이, 일본 등의 캠페인에 돌아다니며 ‘전쟁 없는 세상’과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이 생기지 않는 세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2014년에는 베트남 한국군성폭력 피해자에게 사죄 메시지를 전달해 진정한 연대의식을 보여줬다. 당시 그는 “나도 일본군에 의해 위안부 피해를 입었지만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에 의해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에게 한국 국민으로서 사죄를 한다”며 “여러분이 살아 있는 동안에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열심히 나비기금을 모아서 지원하겠다”고 진정성 어린 말을 건넸다.
세계는 그를 ‘인권운동가’라고 칭했다. 2015년 국경없는기자회와 프랑스 AFP통신은 김 할머니를 ‘자유를 위해 싸우는 세계 100인의 영웅’으로 선정했다. 국제여성인권단체 ‘성평등을 위한 여성 이니셔티브(WIGJ)’는 2017년 ‘성평등 유산의 벽’에 김 할머니의 이름을 새겼다.
김 할머니는 일본의 사죄를 얻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흔적은 여러 형태로 우리 곁에 남을 전망이다. ‘김복동 평화상’은 김 할머니가 여성인권상으로 받은 5000만원을 기부해 만들어진 전시 성폭력 피해자지원을 위한 상이다. 김복동 평화상 1회 수상자는 우간다 내전 성폭력 생존자이자 인권운동가인 ‘아칸 실비아’였다. ‘김복동의 희망’은 김 할머니가 재일동포 청소년들을 돕기 위해 만든 장학금 재단이다.
안규영 기자 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