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신차는 어떤 색상들이 출시되나요?”
“저희가 어떤 색상으로 내놔도 흰색, 검은색, 회색만 구매하실 거잖아요. 하하하!”
언젠가 한 글로벌 자동차회사 해외지역 법인의 임원과 나눈 대화다. 한국 소비자만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전 세계 소비자들이 대부분 같은 선택을 한다는 놀라운 얘기다. 그럼 당신의 자동차는 무슨 색인가. 흰색, 검은색, 회색(은색 포함) 중 하나일 확률이 80%는 될 것이다. 이미 조사로 입증됐다.
독일계 글로벌 화학기업 바스프(BASF) 코팅사업부가 지난해 글로벌 시장에서 생산·판매된 자동차의 색상 선호도에 대해 분석한 보고서를 최근 내놨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에서 팔린 자동차의 80%가 흰색, 검은색, 회색 등 무채색 계열이다. 미국 엑솔타 코팅 시스템즈가 조사한 보고서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볼 수 있다. 무채색 중 가장 인기 있는 색상은 흰색이다. 북미 지역에서 4대 중 1대 이상, 유럽에선 3대 중 1대 이상이 흰색이다. 아시아의 경우 특히 선호도가 높다. 무려 2대 중 1대가 흰색이다. 나름의 이변이라면 2등 자리가 검은색에서 회색으로 바뀐 지역들이 있다는 것 정도다.
보고서에 따르면 유채색을 선택하는 비율이 예전에 비해 점차 늘어나는 경향을 보였다. 모든 지역에서 유채색 순위는 빨간색이 1위, 파란색이 2위다. 유채색은 소형이나 준중형 등 작은 차급에서 좀 더 인기가 있었다. 유채색 계열 선호도가 특히 늘고 있는 지역이 중국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중국의 요즘 세대는 예전보다 자신의 색상 취향을 잘 드러내는데, 이것은 삶에 대한 태도나 라이프스타일이 변화하는 것과 비슷한 흐름이라는 것이 바스프의 분석이다. 하지만 자동차의 색 선호도가 운전자의 성격 또는 라이프스타일과 연결되는 경향은 모든 지역에서 늘었다고 한다.
유럽으로 가보자. 지난해 유럽에서 팔린 차 5대 중 1대는 회색이었다. 두 번째로 인기 있는 색상이 최근 검은색에서 회색으로 바뀌면서다. 회색은 은색에 가까운 밝은 색상부터 짙은 무연탄색까지 110여 가지에 이른다. 업계 관계자는 15일 “일반 소비자의 눈에는 그저 회색으로 보일지 몰라도, 각각의 색이 주는 감성은 자동차를 만드는 전문가들에겐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북미 지역에서도 다양한 무채색 차량이 75%를 차지했다. 유채색 중 빨간색에 대한 선호도는 증가하는 추세다. 픽업과 스포츠카 세그먼트에서 특히 그렇다. 지난 10년간 크로스오버유틸리티차량(CUV)은 북미에서 지배적인 세그먼트로 떠올랐지만, 이 세그먼트에서도 여전히 인기 순위는 흰색, 검은색, 회색 순이다.
한국이 속해 있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어떨까. 아시아·태평양에서 흰색의 인기는 지구 어느 곳에서보다 높았지만(심지어 전년에 비해서도 높았지만) 유채색의 비중 또한 늘었다. 검은색 중에서도 반짝이는 느낌을 주는 스파클링 블랙은 여러 세그먼트에서 수요가 늘었다.
그럼 한국에서 자동차 색상 선호도는 어떻게 나타날까. 엑솔타 코팅 시스템즈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선 흰색(32%) 회색(21%) 검은색(16%) 은색(11%) 등 순으로 선호도가 나타났다. 실제 판매 결과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
스테디셀러인 현대차의 세단 ‘그랜저’와 SUV ‘싼타페’의 색상별 판매 비중을 비교해봤다. 그랜저의 경우 무채색 계열의 비중이 무려 97.4%에 달한다. 그럼 세단보다 유채색 선택 비율이 높은 SUV는 결과가 다를까. ‘레인포레스트’의 경우 카키색과 회색이 섞인 색상이어서 무채색 계열에서 제외했음에도 싼타페 역시 무채색 계열의 판매 비중이 88.4%다. “선호도가 높지 않기 때문에 유채색으로 출시되는 모델이 많지 않다”면서 “대신 무채색을 다양하게 출시한다”는 게 국내 자동차업체 관계자의 전언이다.
사람들이 무채색 자동차를 사는 이유는 작은 흠이 생겨도 눈에 잘 띄지 않아 관리가 편하고, 질리지 않고 튀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이유로 되팔 때에도 가격을 높게 받기 유리하기 때문이다. 고가의 소비재라는 특성상 소비자들이 보수적으로 구매하는 탓이기도 하다. 특히 대형 세단에서 무채색 비중이 높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에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문화가 색상 선택에 영향을 준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전 세계적인 색상 트렌드가 무채색이라고 하니 이 같은 해석은 그저 참고사항일 뿐이다.
지난해 국내에선 쌍용차의 소형 SUV ‘티볼리’의 판매 추이에서 흥미로운 점이 발견됐다. 대부분 유채색은 판매 비율이 1%를 넘기기가 힘들다는 것이 업계 정설이다. 그런데 티볼리의 오렌지팝 컬러 판매율은 7%를 넘었다. 비교적 낮은 연령층, 여성의 구매율이 높은 것과 무관치 않은 듯하다는 것이 쌍용차 관계자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색상은 자동차 성능에 영향을 미칠까. 현대차 관계자는 “검은색 등 짙은 색상의 차가 밝은 색보다 여름에 더 뜨거워지긴 하지만 기계공학적인 기능상의 차이가 발생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