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멕시코 국경장벽 건설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결국 국가비상사태(National Emergency)를 선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지층을 결집시킬 수 있는 반(反)이민 정책으로 2020년 재선 승부수를 걸었다. 장벽 건설에 반대하는 민주당은 국가비상사태 선포 관련 청문회와 소송전을 예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5일(현지시간)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국경을 전혀 통제 못하고 있고, 남쪽 국경은 국가안보 위기에 직면했다”며 “국가비상사태 선포문에 서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지금 미국은 마약과 폭력, 갱단의 침략을 받고 있다”며 “전임 대통령들도 국가비상사태를 아주 많이 선언했었다”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한 이유는 연방정부 셧다운(업무정지) 재발을 방지하면서도 장벽 건설을 강행하기 위해서다. 미국에서는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면 대통령이 의회 승인 없이 예산을 재편성할 수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국경장벽 건설 예산으로 군사 건설 예산 36억 달러, 마약단속 예산 25억 달러, 미 재무부의 자산 몰수기금 6억 달러 등 70억 달러에 이르는 자금이 전용될 수 있다고 백악관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했다.
앞서 미 의회는 국경장벽 예산으로 13억7500만 달러를 배정하는 것에 합의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장벽 완공에 필요한 57억 달러와 큰 차이가 난다며 불만을 표했다. 하지만 셧다운 재발을 막으려면 트럼프 대통령은 이 예산안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미 언론은 트럼프 행정부가 길게는 11개월간 국가비상사태 선언 카드를 고민했다고 보도했다. WP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3월 폴 라이언 당시 하원의장과 국경장벽 예산 문제로 언쟁을 벌인 뒤 백악관 참모들에게 의회 승인을 건너뛰고 국경장벽 건설비용을 조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해 중간선거에서 하원이 민주당을 장악하자 트럼프 대통령이 위기감을 느끼고 국경장벽 문제에 더 집착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미국 대통령의 국가비상사태 선언은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 1976년 국가비상사태법 제정 이후 미국에서 국가비상사태는 총 58번 있었다. 그중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12번,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13번,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17번 선포했다.
다만 전임 대통령들은 테러나 분쟁, 신종플루 등 보건 문제에 긴급 대응하기 위해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국경장벽 건설처럼 대통령 공약을 밀어붙이기 위해 비상사태를 선포한 경우는 전례가 없다. 특히 군사 건설 예산을 전용하는 것은 2001년 9·11 테러로 국가비상사태로 돌입한 후 처음이다.
민주당은 이번 국가비상사태 선포는 대통령 권한을 남용한 처사라며 반발했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의회의 예산권을 명백히 위반한 행위”라며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헌법적 권한을 지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제럴드 내들러 하원 법사위원회 위원장은 “비상사태 선포 과정을 추궁하기 위한 청문회를 열 것”이라고 말했다. 펠로시 의장과 뉴욕 캘리포니아 네바다 뉴멕시코 등의 민주당 소속 주지사들은 위헌 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공화당 내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있다. 톰 틸리스 공화당 상원의원은 “오바마 대통령의 국가비상사태 선포를 ‘행정권 남용’이라고 비판했던 공화당이 지금의 트럼프 행정부를 지지하는 것은 위선적”이라며 “만약 버니 샌더스가 대통령이 되면 환경보호 정책을 실시한다며 비상사태를 선포할 수도 있다”고 비판했다. 반면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는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한편 유엔 주재 미국대사로 지명됐던 헤더 나워트 미 국무부 대변인은 유엔 주재 대사 후보직 사의를 표명했다. 나워트 대변인은 성명을 내고 “지난 2개월간 우리 가족은 힘든 시간을 보냈다”며 “가족을 위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게 최선의 결정일 것”이라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나워트 대변인을 니키 헤일리 대사 후임으로 지명했다. 폭스뉴스 앵커 출신인 나워트 대변인은 최근 인사 검증 과정에서 취업 허가를 받지 않은 이민자를 유모로 고용하는 등 결격 사유가 발견됐다고 블룸버그통신은 전했다.
조민아 기자 minaj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