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ASEAN) 시장에 ‘기회의 문’이 열리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아세안 회원국 가운데 주요 5개국(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베트남 태국)의 최대 교역 상대는 중국이었다. 하지만 중국이 미국과 무역전쟁을 벌이면서 아세안 국가들과의 경제협력 구도에 균열이 생겼다. 이 틈은 파고드는 건 한국과 일본이다. 한국은 신남방정책에 속도를 붙이면서 아세안 5개국과의 무역규모가 급증하고 있다. 다만 1960년대부터 아세안에 투자와 무상원조를 지속한 일본의 저력이 만만치 않다. 중장기 전략을 수립해 일본과 차별화된 아세안 진출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은행은 17일 해외경제포커스 ‘아세안 국가의 대외무역 현황 및 향후 발전방안’ 보고서를 발표하고 “아세안 5개국은 미·중 무역분쟁 등을 겪는 중국과의 협력 관계가 다소 정체되고 한국 일본과의 경제협력 관계가 밀접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아세안 국가들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꾸준한 성장세를 보였다. 그중에서도 주요 5개국이 돋보인다. 이들 국가의 2009~2017년 수출입 증가율은 연평균 5% 이상을 기록했다. 선진국(연 0%대)은 물론 전체 신흥국(연 3%대)보다 높은 증가세다.
특히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태국의 경우 2017년 수출입 규모가 그해 국내총생산(GDP)을 넘어섰다. 활발한 대외무역을 기반으로 아세안 5개국은 연평균 5%를 웃도는 GDP 성장률을 누렸다.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아세안 5개국 비중도 2000년 4%대 초반에서 최근 5%대 중반까지 상승했다.
그동안 아세안 5개국의 성장을 이끈 것은 중국과의 교역이었다. 산업 고도화를 선언한 중국은 저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하는 역할을 아세안 국가들에 넘겨줬다. 아세안 5개국은 중국의 중간재를 수입해 완제품으로 만들어 파는 글로벌 공급망을 형성했다. 아세안 5개국 교역량에서 중국 비중은 2000년대 4위권이었지만 2017년 미국 일본 등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섰었다.
그러나 최근 흐름이 달라졌다. 중국의 내수 중심 성장전략, 미·중 무역전쟁 장기화로 이런 교역구조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글로벌 생산기지 역할을 하던 중국이 위축되면서 아세안 5개국과 중국 사이의 교역 네트워크는 흔들리고 있다. 대신 한국과 일본의 대(對)아세안 무역량은 늘고 있다. 한은에 따르면 한국의 대(對)아세안 중간·자본재 수출은 최근 10년간 연평균 13.0% 이상 증가했다. 일본도 2015년을 기점으로 증가세로 돌아섰다.
이에 따라 한국이 기술 우위를 바탕으로 아세안 5개국과 분업체계를 탄탄하게 구축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과 다른 전략을 써 ‘아세안 시장’을 거머쥐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은은 “국내 기업의 베트남 진출 경험을 활용해 경제협력 관계를 다른 아세안 국가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며 “단순 조립·가공을 넘어 현지 우수기업과의 합작투자, 기술 협력 등을 중심으로 교역 관계를 넓혀나가는 차별화 전략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