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황규백(87·사진) 작가가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갖고 있다. 그는 원래 대표적인 판화작가였다.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가진 회고전도 한국 미술사에서 판화가로 기여한 작가를 조명하는 전시였다. 나이가 듦에 따라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힌 작가는 수년 전부터 붓을 들었고, 이탈리아 여행에서 마주친 프레스코 벽화에서 영감을 받아 거친 마티에르와 사실적 이미지가 병합된 회화를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회화에는 시계 우산 창 집 바위 같은 일상의 사물들이 등장한다. 작가는 이것들을 엉뚱하게 병치함으로써 그 비현실감을 통해 시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최근 개막식에서 “뭔가를 보고 그리지는 않는다. 하나하나 엉뚱한 상황을 상상하면서 사물들을 첨가한다. 그 사물들을 보고 있으면 보이지 않은 세계를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백조가 놀고 있는 호숫가 바위 위에 바이올린이 놓여 있는 식이다. 도대체 바이올린은 저기 왜 있을까 하는 궁금함을 자아냄으로써 새로운 시적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의 작품은 나뭇가지에 시계가 걸려 있는 그림을 그렸던 초현실주의 작가들을 떠올리게 한다. 박민혜 큐레이터는 “초현실주의가 이성에 의해 통제된 사고를 부정하고 무의식의 세계를 미술에 옮기고자 한 시도였다면 황규백 선생의 작품은 감상자의 기억을 환기해 감성을 자극한다”고 해석했다.
작품에는 우산이 자주 등장한다. 우산은 벽에 기대 한밤의 달을 구경하거나, 멀리 이국적 풍경을 조망하기도 한다. 구체적인 현실 장면이 연상되는 작품도 있다. 붉은 벽돌집 창 너머로 파란색 다리가 길게 이어져 있는데, 누가 봐도 도보다리다. 지난해 4·27 남북 정상회담 때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산책하며 30여분간 단독회담을 나눴던 그 ‘친교의 다리’다.
작가는 한국전쟁 때 참전해 3년간 전쟁터를 지키며 인간의 잔혹상을 목격했다. 전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던 건 전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작가는 “도보다리 대화를 TV로 지켜보며 감격해서 울었다. 그 장면을 꼭 기억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창틀 아래 우산은 작가의 분신인 셈이다. 10일까지.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