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안익태의 친일 행적이 다시 입길에 오르면서 ‘애국가’ 사용에 대한 찬반 논쟁이 뜨겁게 불붙고 있다. 이런 풍경은 음악을 비정치적인 순수한 영역이라 여기는 낭만적인 착각에서 벗어나게 한다.
음악학자 이경분의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세계적인 음악가 안익태의 숨겨진 삶을 찾아서’가 안익태의 친일 음악 활동을 거론했다면, 이해영 한신대 교수의 신간 ‘안익태 케이스-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는 그의 정치적 행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이 교수는 그가 일제 특수공작원이었던 에헤라의 집에 기식했다는 점 때문에 그 또한 ‘일제 스파이’라는 ‘심증’을 갖는다. 또 현 애국가가 법적 근거가 없다는 점을 들어 새 국가를 공식적으로 제정하자고 한다.
안익태와 애국가 논쟁에서 우리는 예술작품과 예술가의 도덕성을 동일시해야 하는지에 관한 딜레마에 빠진다. 우선 두 저서가 다루지 않은 애국가의 작곡 동기는 제목 그대로 지극히 “애국”적이었다. 미국 유학 중이던 1936년 안익태는 3월 26일자 ‘신한민보’에 다음 글을 기고했다. “미국에 온 후 목적한 바 몇 가지 일이 있었는데 제일 급선무로 대한국(大韓國) 애국가를 작곡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사랑가로도 부르고 어떤 나라에서는 이별가로도 부르는데 참으로 대한국 애국가로서 그 곡조를 사용함은 대한국의 수치인 줄로 자각하였습니다.” 당시 재미교포가 발행하던 ‘신한민보’는 안익태의 애국가 보급에 나섰고, 40년 12월 20일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애국가를 일제 치하 한국의 공식 국가로 승인했다.
안익태의 친일 행적이 가시화된 것은 임시정부의 애국가 승인 후의 일이다. 미국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그는 독일의 거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제자가 되었고,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최초의 한국인 지휘자가 됐다. 하지만 슈트라우스는 친(親)나치 음악가였고, 당시 베를린 필 또한 나치 선전에 활용된 침략의 전령사이자 나팔수였다.
안익태의 전향 이유가 이 교수의 주장대로 개인의 출세욕 때문인지, 아니면 정치적으로 불가피한 상황이었는지는 현재 시점에서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전체주의가 절정에 오른 전시 체제 아래 일본의 동맹국이던 독일에서 조선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자유주의 국가인 미국에서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식민지 출신의 동양인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실력 있는 음악가로 조명을 받았다. 베를린 필 자료실장은 슈트라우스가 안익태를 후원한 이유에 대해 “당시 내세울 만한 일본 출신 지휘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이런 그를 일제가 가만히 놔둘 리는 만무했다.
물론 그의 친일 행적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런 과거가 애국가를 바꾸고 친일파의 음악을 제거하는 식으로 간단히 청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서양음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고 활성화된 것이 1920년대 조선총독부의 후원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한국 음악가들에 의한 것임을 상기하면, 우리가 향유하는 현재 서양음악이 그 자체로 ‘친일’이라는 과거에 빚을 지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안익태와 애국가는 우리에게 불편한 진실이고 어려운 딜레마다.
<음악 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