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현장에 늦은 결혼과 출산, 인구 고령화 같은 사회구조적 변화나 젊은층 만성 질환의 증가 등 질병 트렌드를 반영한 이색 클리닉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새롭고 획기적인 의료기술을 발빠르게 도입해 환자 치료에 적용하는 사례 또한 늘고 있다. 국민일보는 ‘주목! 이 클리닉’과 ‘첨단의료 현장을 찾아서’ 코너를 마련해 의료계에 불고있는 변화의 바람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늦게 결혼한 30대 후반의 여성 A씨는 시험관아기 시술을 시도했으나 임신 실패와 유산을 거듭했다. 설상가상 자궁에 생긴 혹(근종·양성종양)이 10㎝까지 커져 더는 임신이 안 될까 염려됐다. 무려 1㎏을 넘는 거대 자궁근종은 자궁을 눌러 착상을 어렵게 한다. 근종 제거 시에도 임신을 위해 자궁 조직 손상을 최소화하는 정교한 수술이 필요하다. 알음알음으로 A씨가 선택한 것은 로봇수술이었다. 배꼽에 작은 구멍 하나만 뚫고 로봇팔을 집어넣어 정밀하게 근종만 떼어냈다. 자궁이 완전 회복된 후 과거 시험관아기 시술 때 냉동해 뒀던 배아(수정란)를 이식했더니 번번이 실패했던 임신에 바로 성공했고 조만간 출산을 앞두고 있다.
최근 자궁 내막증과 자궁 근종을 가진 젊은 여성들이 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자궁 내막증으로 진료받은 20~39세 가임기 여성은 2013년 3만6643명에서 2017년 4만5310명으로 4년새 약 24% 증가했다. 자궁 근종 환자도 2013년에 비해 2017년에 약 14% 늘었다. 초경 나이가 빨라지고 결혼과 첫 출산 연령이 늦어지면서 여성 호르몬(에스트로겐)에 노출되는 기회가 많아진 탓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자궁 내막증과 자궁 근종이 임신과 출산을 어렵게 한다는 점이다. 생리 시 밖으로 빠져나와야 할 자궁내 조직이 자궁 밖의 다른 부위에 들러붙어 증식하는 자궁 내막증은 난자와 정자, 배아의 이동 통로인 나팔관 기능을 떨어뜨린다. 자궁 근종은 정자와 난자의 수정과 착상을 방해하고 자꾸 자라면 임신 유지에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이 때문에 가임기 여성들은 질병 치료 못지않게 나중에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이를 반영하듯 몇 년 전부터 대형병원 산부인과를 중심으로 ‘가임력 보존 치료’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화여대 목동병원은 2016년 발빠르게 ‘가임력보존센터’를 개설하고 남녀 구분 않고 임신이 가능하게 하는 최신 치료법을 도입해 성과를 내고 있다. 이 병원 정경아(산부인과 교수) 가임력보존센터장은 4일 “과거 가임력 보존 치료는 생식 기능 저하가 예상되는 젊은 암 환자나 난소 수술 환자들을 대상으로 제한적으로 시행됐으나 최근 자궁 근종 등 부인과 질환 진단을 받고 자연 임신을 원하는 젊은 여성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미혼 여성 암 환자는 임신에 대비해 항암 및 방사선 치료 시작 전 미리 난자를 채취해 냉동보관한다. 기혼일 경우 남편의 정자와 수정시킨 배아를 냉동해 놓는다. 남성 암 환자도 항암 치료 후 올 수 있는 무정자, 정자 기형 등을 대비해 사전에 정자 냉동을 시도하기도 한다.
젊고 아이가 없는 사람들에겐 암 선고보다 가임력의 상실이 더 두려운 일이지만 다양한 가임력 보존 치료를 통해 임신과 출산에 성공하는 사례가 점차 늘고 있다.
아울러 최근 증가하는 자궁 내막증과 자궁 근종 진단을 받은 여성들의 경우, 로봇수술이 자연 임신 확률을 높이는데 기여하고 있다. 정 센터장은 “여성 생식기는 골반 안에 다른 장기와 가까이 붙어있기 때문에 수술이 매우 까다롭다”면서 “특히 임신을 원하는 여성들은 세심한 수술이 필요한데, 좁은 공간에서 정밀성 높은 로봇수술로 가능해졌다”고 설명했다.
로봇수술은 배꼽 부위에 2~2.5㎝ 구멍을 뚫고 그 안으로 수술 도구를 장착한 로봇팔을 집어넣어 진행된다. 로봇팔은 사람의 관절처럼 섬세하게 움직이는 데다 3D입체 영상과 10배 넓은 시야 확보로 정밀한 수술이 가능하다. 지혈도 소작법(고열로 지짐) 대신 봉합(실로 꿰맴)을 주로 하기 때문에 주변 조직 손상을 줄여 가임력을 더 잘 보존할 수 있다.
정 센터장팀이 최근 거대 자궁근종 여성 98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전체의 70.4%가 근종으로 인해 자궁 내막이 눌리거나 비틀어져 난임 위험 소견을 보였다. 하지만 로봇수술 후 91.8%가 정상 자궁 모양으로 돌아왔고 정상 생리를 회복했다. 수술 후 임신을 원하는 여성의 58.3%가 자연 임신에 성공한 것도 확인했다. 정 센터장은 “부인과 질환으로 자칫 잃어버릴 수 있는 건강한 자궁과 난소를 더 잘 지켜 주는데 로봇수술이 좋은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가임력 보존 치료는 미래 임신을 돕는 ‘보험’ 같은 치료”라면서 “암이나 자궁 근종 등 의학적 이유로 난소 기능이 감소된 여성들의 임신을 돕기 위해 시행되는 난자 냉동보관 등에 건강보험이 확대 적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