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옥의 지금, 미술] “생계는 다른 일로” 슬프고도 진중한 이 시대 예술가 초상

돈선필 작가가 4일 개인전 ‘끽태점’이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유리 진열장에 기성품 피규어와 자신이 만든 피규어를 섞어 상점처럼 진열해 놓은 상태 그 자체가 전시 작품이다. 윤성호 기자


기분이 이러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전시가 열린 미술관에 책상 하나 놓고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우울감이 밀려왔다. 어느 순간부턴, 작가의 눈가가 젖어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피규어 작가’ 돈선필(35). 오타쿠적 취미를 직업으로 발전시킨 밀레니얼 세대의 전형. 그래서 돈벌이엔 무심한, ‘미술하는 부잣집 아들’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런 상상의 상투성이 그가 속한 청년 세대에 무심했던 내 세대의 꼰대성 탓일 거라는 부끄러움에 젖어 들게 한 작가다.

‘돈선필 개인전: 끽태점’(6월 13일까지)이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4일 그를 만났다. 한국 근대 건축의 아버지 김수근이 설계한 붉은 벽돌 건축물인 ‘공간’ 사옥을 개조한 전시장에는 장난감 가게처럼 피규어를 진열한 유리 진열장이 3개 놓여 있었다. 그게 작품이다. 회화나 조각이 아니다. 근사한 설치미술도 아니다. 저게 미술이냐는 비아냥거림을 들을 만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작품이라고 내놓는 ‘작가적 배짱’에 나만의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는 ‘나나랜드족’을 예상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밀레니얼 세대가 누군가. 사전적 정의를 보면 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출생한 세대를 가리키는 말로, 정보기술(IT)에 능통하며 대학 진학률이 높다. 동시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회에 진출해 고용 감소, 일자리 질 저하 등을 겪은 세대이다. 미래가 나아질 기미가 없으니 지금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도 즐기자는 ‘소확행’이 이들을 대변하는 정서다. 우울은 밀레니얼 세대에 껌딱지처럼 달라붙은 감정인지도 모른다.

전시명은 형태를 음미할 수 있는 상점이라는 뜻의 ‘끽태점(喫態店)’이다. 일제강점기 ‘근대의 맛’ 커피를 마시던 경성의 다방 ‘끽다점(喫茶店)’을 연상시키는 이 제목은 우리에게 새로운 미술을 맛볼 것을 권한다.

작가의 관심사는 피규어다. ‘원피스’ ‘건담’ 등 인기 애니메이션과 게임 속 캐릭터를 조형물로 축소해서 재현한 장난감이다. 진열장 안에는 레디메이드 피규어와 작가가 직접 제작한 피규어가 섞여 있다. 어느 게 만든 거냐고 물었더니 랩하듯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맞추는 것도, 작품 콘셉트~지요.”

자신이 선호하는 형태나 사이즈가 있는데 기성품으로 만족이 안 될 때 제작한다고. 이것은 ‘작가에게 만드는 것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는 피규어를 현대를 대표하는 조각이라고 했다. 우선 조각보다 재밌다. 조각은 작가 혼자 하는 작업이지만, 피규어는 캐릭터를 디자인하고 금형을 뜨고 구매하는 등 생산과 소비 과정에 여러 단계의 사람들이 걸쳐 있다. 그런 관계망이 우리 사회를 보여주는, 시대의 화석 같은 것이라고 했다.

작가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피규어를 모았다. “살아오면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관심사가 피규어였어요. 미대(홍익대 판화과 04학번) 가서 미술을 전공하면서 현대 미술을 알게 됐어요. 졸업 직후인 2011년쯤일 겁니다. 미술과 공산품을 나누는 기준은 뭘까 고민하다가 이런 작품을 구상하게 됐어요.”

프랑스 출신 미국 작가 마르셀 뒤샹이 남성 변기를 뒤집어 놓고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전시장에 내놓은 것이 1917년의 일이다. 레디메이드(기성품) 피규어를 늘어놓고 작품이라고 하는 그를 탓한다면 교양 부족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런데도 입시 교육에서 미술은 찬밥이라 돈선필의 피규어 작품은 대부분 관람객에게 낯설다. 그것도 아주 많이.

상업화랑이 아닌 미술관이니 전시라도 열렸지, 작품이 팔릴 수 있을까 싶다. 작가의 목소리에서 슬픔이 배어 나온다고 느낀 건 이 질문을 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남들은 철컥 붙는 레지던시(1년간 작업 공간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에도 떨어졌다. 친구와 공유하는 작업실의 3평 방에 지금껏 수집하고 작업한 피규어를 쌓아뒀다. 금액으로 치면 3000만원어치는 족히 된다.

작품은 팔리지 않고 작가로 살기 어려워 피규어 상점이라도 낼까 싶어 ‘끽태점’ 사업자 등록까지 했는데, 그게 이번 전시로 바뀐 것이다.

잘 팔리는 회화 작업을 하지 않는 그에게 생계 문제는 앞으로도 막막한 일이다. “그런 부분은 포기하고 살아요. 점점 큰 집으로 옮겨가는 그런 꿈 말이에요. 요즘 ‘소확행’이 유행하잖아요. 알고 보면 굉장히 기분 나쁜 단어에요. 아버지 세대만 해도 대학만 나오면 취직할 데를 골라서 갔다는데….”

그는 미술가를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명예직 같은 거, 좋아서 하는 일, 넓은 의미로는 진중한 취미활동”이라고 했다. 생계는 다른 일을 해서 꾸리고 있다고.

작가는 마포구에 ‘취미가’라는 작품 판매 공간을 운영하지만 임대료 내기도 벅차다. 어쩔 수 없이 예술이 취미가 돼버린 밀레니얼 세대 예술가의 초상을 그에게서 봤다. 피규어 작품엔 우리 시대 청년들의 ‘소확행’ 심리가 응축돼 있다. “재밌기는 한데요, 즐기기에는 슬퍼요.”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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