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영화 배급시장이 격동기에 들어섰다. 지난해 우후죽순 등장한 신생 투자·배급사들이 연이어 신작을 내놓으면서, CJ엔터테인먼트와 롯데엔터테인먼트 쇼박스 NEW(뉴) 4대 메이저 회사가 장악했던 시장에 크고 작은 파장이 일고 있다. 스타트를 끊은 건 메리크리스마스와 셀트리온엔터테인먼트인데, 이들의 희비는 엇갈렸다.
메리크리스마스는 10년간 쇼박스를 이끌었던 유정훈 전 대표가 중국 미디어그룹 화이브라더스의 투자를 받아 설립한 회사다. 첫 투자·배급 작품인 ‘내안의 그놈’을 지난 1월 선보였는데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총제작비 45억원이 투입된 영화는 손익분기점(120만명)을 훌쩍 뛰어넘으며 191만명 이상의 누적 관객을 동원했다.
당초 ‘내안의 그놈’은 기존 주요 배급사들에게 모두 거절당한 작품이었다. 두 인물의 몸이 바뀌는 중심 설정 자체가 식상한 데다 진영 이수민 등 티켓파워가 검증되지 않은 배우들을 전면에 내세워 성공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평가됐다. 메리크리스마스는 과감한 선택을 했고, 이 영화로 1월 배급사별 관객 점유율 순위 4위(10.4%)에 올랐다.
개봉 예정작 라인업도 쟁쟁하다. 먼저 200억원대 제작비가 투입된 우주 블록버스터 ‘승리호’가 기대를 모은다. ‘늑대소년’(2012)의 조성희 감독과 배우 송중기가 7년 만에 의기투합한 작품으로, 김태리가 출연을 논의 중이다. 박해수 서예지가 주연한 ‘양자물리학’과 이순재 정영숙 주연의 노년 로맨스 ‘로망’도 개봉을 기다린다.
셀트리온엔터테인먼트는 시작이 좋지 않다. 바이오기업 셀트리온홀딩스가 만든 이 회사는 배우 이범수가 영화 부문 대표를 맡고 있다. 배우 정지훈을 주연으로 기용해 제작·투자·배급까지 진행한 ‘자전차왕 엄복동’을 지난달 27일 개봉했는데 5일 동안 관객 15만명을 넘기는 데 그쳤다. 총제작비 130억원을 쏟아부은 영화는 손익분기점(400만명) 근처에도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출격을 기다리는 신생 배급사들이 적지 않다.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는 정현주 전 쇼박스 투자제작본부장이 화장품 브랜드 AHC를 1조원에 매각한 이상록 전 카버코리아 회장의 투자를 받아 설립한 회사로, 올해 ‘악인전’ ‘클로즈 투 유’ ‘해치지 않아’ ‘변신’ ‘더러운 돈에 손대지 마라’ 등 기대작 다섯 편을 준비 중이다.
지난해 영화 투자·배급업에 진출해 ‘범죄도시’와 ‘기억의 밤’으로 연이은 성공을 거둔 키위미디어그룹(대표 정철웅)은 올해 ‘유체이탈자’ ‘바디스내치’ ‘헝그리’ 등을 선보인다. 국내 최대 포털사이트 네이버가 CJ ENM 영화사업본부장을 지낸 권미경 대표와 손을 잡고 출범시킨 스튜디오N은 ‘비질란테’ ‘여신강림’ ‘금수저’ 등 네이버 인기 웹툰들을 영화화한다.
신생 투자·배급사들의 잇단 시장 진출을 바라보는 영화계 시선은 엇갈린다. 중소형 제작사들은 대체로 반기는 분위기다. 새로운 자본이 유입됨에 따라 영화 제작과 유통의 활로가 뚫리고 자연히 콘텐츠의 다각화 또한 이뤄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반면 영화산업 매출이 수년째 연 2조원대에 머물고 있는 포화 상황에 과도한 ‘제 살 깎아먹기식’ 경쟁이 빚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한 관계자는 “다 같이 성공하기 힘든 구조가 됐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시장 상황은 결국 관객의 선택에 따라 정리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