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활을 건 전장.’
한국 대학생 80.8%가 생각하는 우리나라 고등학교 이미지다(2017년 한국개발연구원 조사). 치열한 전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 한다고 20대들은 배워왔다. 드라마 ‘SKY 캐슬’에 나오는 치열한 입시 경쟁이 현실과 흡사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취재진은 이런 경쟁사회 속에 살고 있는 20대 청년 10명을 만났다. 기사에 등장하는 ‘고독인’씨의 이야기는 그들의 발언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고독인(가명·25)씨가 ‘경쟁사회’ 속에 살고 있다는 걸 느낀 건 고등학교 때다. 시험이 끝나면 복도에 시험 등수가 공개됐고 전교 40등까지는 특별반으로 분류됐다. 특별반 학생은 점심시간에 줄을 서지 않고 급식을 받았고 명문대 선배와의 만남, 입시 컨설팅 등 특별대우를 받았다. 누군가 시험을 망쳤다고 하면 남몰래 기뻐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반 친구 모두가 사실상 라이벌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에 가서도 경쟁은 계속됐다. 어떤 교수는 학생들에게 발표를 시킨 뒤 다른 학생들의 투표로 점수를 매겼다. 고씨는 졸업이 다가오자 초조해졌다. 영상마케팅 분야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포기하고 공기업 시험을 준비했다. 1년6개월이 지나자 친구 만나는 게 불편해졌다. 친구들의 취업 성공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불안해져서 아예 SNS를 끊어버렸다.
고씨는 대학생 익명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서 위로를 받는다. “힘들다. 나 좀 위로해줘. 펑펑 울면 나아질까” “저 잘하고 있다고 한 번만 위로해주세요.” 에브리타임엔 이런 글들이 하루에도 수십개씩 올라온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20대들이 경쟁으로 인해 얼마나 지쳐 있는지 보여준다. 고씨는 이런 글을 보면 ‘나만 이런 건 아니구나’ 싶어 위안이 된다고 했다. 고씨는 “저는 대학 시절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살았어요. 그러나 남들의 성공을 보면서 상대적 박탈감만 커졌죠. 나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친구의 성공을 깎아내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저만 더 외로워졌습니다”라고 말했다.
경쟁사회에 놓인 20대들은 외롭다. 국민일보와 대학내일20대연구소가 지난 1월 11~14일 전국 20대 3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모바일 여론조사에서 ‘취업준비를 하는 동안 자존감이 떨어졌다’는 응답은 전체의 55.3%였다. ‘친구를 경쟁자로 보게 됐다’는 응답자도 46.0%였고, ‘가까운 친구와 멀어졌다’는 응답도 35.0%로 나타났다. 인수현(가명·23)씨는 11일 “같은 직무에 지원하는 친구들이 경쟁자로 보이기 시작했다”며 “친구보다 스펙이 뒤처졌다는 걸 알면 ‘그동안 뭐 했나’ 하는 자괴감에 빠진다”고 말했다. 로스쿨생 이진욱(가명·24)씨는 “수강신청 기간에 한 학생이 로그아웃을 안 한 친구의 PC에 몰래 접속해 신청한 강의를 전부 뺐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지난해 20대 2613명에게 ‘고독감을 느끼는 이유’를 물었더니 ‘더욱 치열해진 무한경쟁사회 때문’이라는 응답이 44.8%로 가장 많았다. 청춘상담소 ‘좀 놀아본 언니들’의 장재열 대표는 “20대들이 좌절하는 근본 원인은 채용구조, 교육 경직성, 주거 불안정 등 사회구조의 모순”이라며 “그러나 ‘네가 더 노력하면 된다’는 사회와 미디어의 압박이 청년들을 강박 중독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영국 레가툼 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사회적 자본’은 142개국 중 85위로 하위권이다. ‘사회적 자본’은 사회 구성원들이 연대를 통해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정도를 보는 항목이다. ‘협력’이나 ‘신뢰’ 같은 가치보다 서로를 경쟁 상대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의미다.
국민대통합위원회는 최근 ‘한국형 사회 갈등 실태진단 보고서’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정보 공유와 협력을 통한 선의의 경쟁을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사회에서 나타나는 많은 경쟁의 형태가 ‘네가 아니면 내가 죽는’ 투쟁적 경쟁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며 “현재 한국인이 맞이하고 있는 경쟁은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 남에게 해를 입히는 것도 서슴지 않는 단계에 이른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경쟁에 지쳐 목표를 지운 청년들도 있다. 기성세대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평범하게 살고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 된 것이다. 조은애(가명·26)씨는 “경쟁사회 속에서 친구까지 라이벌로 생각하며 치열하게 살고 싶지 않다”며 “평범하게 살아도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20대들은 숨 막히는 무한경쟁에서 벗어나려면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돼야 한다고 했다. 취준생 김성진(가명·24)씨는 “남들보다 우위에 있는 자가 선택되고 나머지는 낙오하는 게 아니라 각자 능력이 존중받고 함께 일하고 다 같이 잘 사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씨는 “‘스카이(SKY) 나와서 9급 공무원이 웬 말’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다양성을 무시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며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을 강요할 게 아니라 사람마다 원하는 삶의 방향이 다른 만큼 다양한 길을 걸을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취재·기사 작성=권민정 박해인 황채림, 도움=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