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 정읍서 한국미술 거장을 만나다

박수근 작 ‘소금장수’(1956년, 하드보드에 유채).
 
전북 정읍시립미술관 특별 기획전 ‘100년의 기다림-한국근현대명화’전을 찾은 관람객들이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단풍철도 아닌 이 봄에 지방 소도시 전북 정읍으로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구경꾼을 부르는 건 정읍시립미술관 특별 기획전 ‘100년의 기다림-한국근현대명화’전이다.

지난 1월 24일 개막한 전시는 입소문이 나며 역대 최단기간인 23일(월 휴관일 제외)만인 지난달 27일 누적 관람객 1만명을 돌파했고, 지난 8일 1만4000명에 육박했다고 미술관 측은 11일 밝혔다. 정읍의 전체 인구는 11만명이다. 최근 이곳을 다녀왔다. 2015년 10월 개관한 정읍시립미술관은 전북 최초의 시립미술관이다. 시기4길 언덕, 미술관 외벽 현수막에 찍힌 박수근의 작품 ‘소금 장수’가 관람객을 기다리듯 앉아 있었다.

전시엔 일제강점기 최초로 서양화 개인전을 연 나혜석부터 2006년 작고하기 전에 살아있는 전설이 된 세계적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까지 한국 근현대 미술사 100년을 보여주는 작가 49명의 작품 70여점이 나왔다. 조선이 서양미술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1900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100년의 시간을 보여주는 전시다.

세 가지 주제로 구성된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교과서 속 우리미술전’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왜 관람객을 끌어들이는지 실감이 난다. 경매 사상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는 김환기, 화강암 같은 고졸한 질감으로 한국적인 미감을 표현하는 박수근, 요절한 천재 화가 이중섭, 한국적 인상주의를 개척한 오지호, 민중미술의 전설 오윤, 한국 근대 조각의 아버지 권진규…. 거의 모두 학창시절에 배운 작가들이라 자녀에게 뭐라도 한마디 설명해 줄 수 있어 와락 반가움이 든다.

‘한국화를 넘어 한국화로’ 코너에서는 동양화의 수용과 변신을 보여준다. 변관식, 이상범의 전통적인 동양화에서 이를 추상으로 발전시킨 이응로, 채색 한국화의 새 경지를 연 천경자, 종이의 물성을 활용해 부조로 발전시킨 권영우 등 전통을 확장한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 ‘새로운 표현의 모색’ 코너에서는 회화를 넘어 설치, 조각, 미디어로 뻗어간 동시대 미술의 다양성에 초점을 맞췄다. TV로 만든 로봇이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백남준의 ‘피버 옵틱’도 이 코너에서 볼 수 있다.

구석구석 흥미 있는 관전 포인트가 있다. 이중섭의 ‘절친’으로 생존 최고령 작가인 김병기를 비롯해 유영국 이봉상 손응성 최영림 등 1916년생 작가 6명이 한 공간에 모였다. 변관식의 동양화 ‘촉산행려도’는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작품이다. 화풍이 정립되기 전의 화보 풍으로 연구자들이 솔깃해할 작품이다. 이인성의 ‘복숭아’, 나혜석의 ‘녹동풍경’ 등 유명 작가들이라도 평소 보지 못했던 작품이 나온 경우가 적지 않다. 이흥재 정읍시립미술관 명예관장은 “일반인은 일반인대로, 마니아는 마니아대로 만족하는 전시”라고 소개했다.

도서관 건물을 개조했기에 층고가 낮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원색의 디스플레이를 통해 관람의 집중도를 높였다. 블록버스터급 전시지만, ‘2019년 정읍 방문의 해’를 기념해 관람료를 무료로 책정한 점도 매력 포인트다. 방문 후기에는 “세 번째 왔다” “정읍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이런 전시를 하다니 놀랍다” 등 칭찬이 이어진다. 큐레이터 강미미씨는 “기존 전시는 인근 지역에서 보러 왔지만, 이번에는 서울 부산 광주 대전 세종 수원 등 전국 단위로 관람객이 다녀간다”고 말했다.

정읍=글·사진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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