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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코너-하윤해] 하노이의 택시 운전사



베트남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출장을 갔을 때 ‘번역 앱’이라는 걸 처음 써봤다. 스마트폰 앱이 번역을 한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한국어와 베트남어까지 통역이 되는 줄은 몰랐다. 교통 통제라는 예상치 못한 복병이 계기가 됐다. 평상시에도 하노이 교통 상황은 좋지 않아 보였지만 베트남 당국은 2차 북·미 정상회담 기간에 도로를 수시로 막았다.

하노이 정상회담 첫날이었던 2월 27일 아찔한 경험을 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묵고 있는 JW메리어트 호텔을 찾았다. 그날 정상회담은 오후 6시15분에 시작될 예정이어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다가 낭패를 겪었다.

갈 때는 괜찮았는데, 올 때가 문제였다. 취재를 마치고 나서 프레스센터로 돌아오기 위해 택시를 탔다가 그만 교통 통제에 걸렸다. 베트남 총리를 만나고 오는 트럼프 대통령 동선과 겹쳐진 것이다. 베트남 당국이 양방향 도로를 봉쇄하는 바람에 차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토바이들까지 엉켰다. 그렇게 택시 안에서 30분이 흘렀다. 서울 편집국에서 국제전화까지 오니 마음은 더 급해졌다. 택시 운전사에게 손가락으로 시계를 가리키는 시늉을 하며 ‘얼마나 더 막힐까’ 질문을 해봤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다. 답답해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 순간 번역 앱이 떠올랐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번역 앱을 설치하니 통역 기능이 작동했다. 한국어·베트남어로 언어를 설정한 뒤 한국어로 말하면 몇 초 뒤에 베트남어로 변환됐다. 베트남어로 말해도 한국어로 통역됐다. 구세주가 따로 없었다.

앱을 깔자마자 택시 운전사에게 “얼마나 더 걸릴까요?”라고 물었다. “저도 예상하기 힘듭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다급한 마음에 “한국에서 하노이 정상회담을 취재하러 온 기자입니다. 저는 프레스센터(베트남·소련 우정노동문화궁전)에 최대한 빨리 가야 합니다”라고 사정했다. 택시 운전사는 도와주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몇 분 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모세의 기적처럼 뒷길이 뚫리기 시작했다. 정체를 못 견딘 차들이 유턴을 하며 역주행을 시작한 것이었다. 우리 택시도 뒤차들이 빠지자 유턴을 한 뒤 역주행을 했다. 그러나 산 넘어 산이었다. 교통 통제는 피했지만, 지독한 정체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택시 운전사가 휴대전화를 달라는 시늉을 했다. 그리곤 번역 앱을 통해 “조금 돌아가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당연히 “좋다”고 답했다. 이후 20분 동안 그는 첩보영화의 추격전 주인공처럼 택시를 몰았다. 과속을 했고, 신호를 무시했으며, 골목길을 달렸고, 오토바이들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려댔다. 놀란 나머지 “이렇게 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도 못했던 것 같다. 그가 시간에 쫓긴 외국 기자를 돕기 위해 쏜살같이 달렸는지, 꽉 막힌 길에 허비한 시간이 아까워서 그랬는지는 분간이 되지 않았다.

프레스센터가 보이자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하노이 정상회담은 우리한테도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합니다”라는 말이 통역돼 들렸다. 갑자기 듣게 된 ‘평화’라는 단어가 낯간지러웠다. 그러다 프레스센터에 함께 걸려 있던 인공기와 성조기, 베트남 국기를 보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하노이 정상회담은 ‘노딜’로 끝났다. 북핵 폐기를 통한 한반도 평화라는 본질은 사라지고 정치공학이라는 껍데기만 남았다. 내년 11월 대통령 선거를 앞둔 트럼프 대통령은 재선 카드로 북한 비핵화 협상을 활용할 것이다. 북한도 핵을 미끼로 제재 해제를 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사정도 우려스럽긴 마찬가지다. 여권은 국면 전환용 카드로, 야당은 정쟁의 수단으로 각각 북핵 문제를 다루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사라지지 않는다. 워싱턴에 돌아온 지금 하노이의 택시 운전사처럼 남·북·미가 그저 평화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으로 북한 비핵화 협상에 임하는 헛된 꿈을 꿔본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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