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는 올레길 외에도 발로 봄을 느낄 수 있는 길이 곳곳에 숨어 있다. ‘날 것 그대로의 제주 속살’을 보려는 여행자들에게 때 묻지 않은 숲길이 새로운 도보여행길로 주목받고 있다. 숲길에서 제주만의 독특한 기암괴석, 나무, 식물, 하천, 소(沼)를 만날 수 있다.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머체왓 숲길’이 대표적이다. 머체(돌)로 이뤄진 왓(밭)이다. 돌의 섬 제주에서 돌이 어디든지 많지 않겠냐만 직설적으로 돌밭이라는 명칭을 붙일 만큼 돌이 많다는 뜻이다.
머체왓 숲길의 시작점은 머체왓방문객센터다. 길은 머체왓숲길(6.7㎞·2시간 30분)과 머체왓소롱콧길(6.3㎞·2시간 20분) 두 코스로 나뉜다. 모두 서중천을 지나간다. 서중천은 한라산 동북쪽에 위치한 흙붉은오름에서 발원해 동남쪽으로 흘러가는 제주에서 세 번째로 긴 하천이다. 제1횡단도로를 지나 거인오름과 머체오름의 북쪽 사면을 따라 남원읍 신례리, 한남리, 의귀리, 태흥리, 남원리 등을 지나 해안에 이른다. 현무암과 기암괴석으로 이뤄져 있는 건천이다. 바위그늘유적을 비롯해 잣성, 숲길 등의 문화자원뿐 아니라 원앙, 구실잣밤나무, 솔비나무 등 다양한 생태적 자원들이 분포해 있다.
머체왓소롱콧길로 들어선다. 소롱콧은 서중천과 주변의 작은 하천을 중심으로 편백과 삼나무 등 여러 잡목이 우거진 숲이다. 지형이 작은 용(龍)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을 얻었다. 하천 곳곳의 소에는 용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작은 용과 큰 용이 자리싸움을 하던 곳, 작은 용이 태어난 곳 등 언뜻 보면 용들의 놀이터였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숲길 입구에 조롱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야트막한 들이 펼쳐진다. 조롱나무 뒤로 봄에는 유채꽃, 가을에는 메밀꽃이 흐드러지고 그 뒤로 오름이 보여 사진 찍기 명소로 이름났다. 길에서 잠시 계곡으로 내려서면 용암이 흘러간 거대한 흔적 주변으로 울창한 숲이 펼쳐진다. 낯선 식물들과 색다른 흙내음 속에서 길을 잃어도 좋을 것 같다.
목장과 숲을 양쪽에 두고 난 길은 2012년까지 50여 년간 이 길에는 사람이 다니지 않았다. 몰래 나무를 자르던 도벌꾼들이 다니던 길을 2012년부터 지역 주민들이 숲길로 조성했다. 1㎞ 정도 지나 자동차가 다닐만한 길을 가로지르면 거대한 숲으로 접어든다. 동백, 편백, 삼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푸른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피톤치드 가득한 편백숲과 하늘을 찌를 듯한 삼나무 숲은 머리를 맑게 하고 피로를 풀어 준다. 나무데크에 앉아 마냥 쉬고 싶은 생각이 든다. 보기 힘든 중잣성도 있다. 돌을 쌓아 만든 담으로 조선 시대 때 농경지와 목축지를 구분하기 위해 축조됐다. 현재 제주에서 얼마 남지 않았다.
돌아나오면 서중천을 건너는 콘크리트 다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머체왓은 돌밭이 아니라 거대한 협곡에 가까운 정도로 웅장하고 장엄하다. 제주의 바람과 물이 만들어낸 기암괴석들이 진기한 광경을 펼쳐놓는다. 용이 바위를 휘감고 지난 듯한 자국이 바위를 장식한다.
이곳에서 서중천을 따라 내려서면 원시 자연숲이 이어진다. 연제비도 인근 하천 중앙 호수 위에 정자처럼 평평하고 큰 돌이 놓여 있다. ‘선녀바위’다. 바위에 전설이 서려 있다. 산 중턱에서 내려온 나무꾼들이 마을과 중간 위치인 이곳에서 쉬다가 목욕하러 내려온 선녀들을 만나 놀았다고 한다.
머체왓숲길은 돌담쉼터, 느쟁이왓다리, 방애혹, 머체왓 전망대, 산림욕치유쉼터, 머체왓집터, 목장길, 서중천숲터널, 참꽃나무숲길을 다 돌아보는데 2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서중천코스에서는 용암수로, 용암바위, 새끼줄용암, 용암제방 등 용암이 흘러내린 흔적을 살펴볼 수도 있다
남원읍 하례2리에 위치한 고살리숲길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숲길’이다. 자연환경과 생태가 잘 보존돼 2013년 자연생태우수마을로 지정됐다. 효돈천을 따라 바로 옆에 난 숲길 2.1㎞를 걷는 데는 왕복 2~3시간이면 충분하다. 한 방향을 택해 1시간 정도 걷는 것도 좋다.
길 바로 옆에서 희귀종인 제주 한란을 비롯해 으름난초, 제주무엽란 등을 볼 수 있다. 특히 숲길 중간쯤에 위치한 ‘속괴’는 고살리숲길에서 놓쳐서는 안 될 명소다. 평소 물이 거의 없는 효돈천이지만 이곳에서는 항상 물을 볼 수 있다. 커다란 바위 위에 적송 한 그루가 우뚝하다. 적송의 그림자를 받아내는 소(沼)가 신비스럽다. 비가 많이 내릴 때에는 바위 사이로 물이 흘러 폭포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서귀포=글·사진 남호철 여행전문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