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는 “북한 비핵화를 점진적으로 진행하지 않을 것”이라며 “우리는 토털 솔루션(total solution·일괄 타결)을 원한다”고 밝혔다. 또 “이에 대해 미국 정부는 완전히 통일돼 있다”고 말했다. 향후 비핵화 협상은 북한이 거듭 주장하는 ‘단계적·동시적 해법’이 아니라 미국의 ‘빅딜’ 방식으로 추진돼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
2차 북·미 정상회담 준비 과정에서 미국 측 실무 협상대표를 맡았던 비건 대표는 11일(현지시간) 카네기국제평화기금이 워싱턴에서 개최한 ‘핵 정책 콘퍼런스’에 참석했다. 비건 대표가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이후 공개 토론회에 참석한 것은 처음이다. 미국 정부 내에서 비둘기파로 분류되는 비건 대표는 매파를 대표하는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판박이 대북 기조를 피력했다. 미국 정부가 하노이 정상회담 이후 강경 기조로 선회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비건 대표는 “우리는 서해(동창리 미사일 발사장)에서 일어나는 (복구)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면서 “우리는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이 무슨 메시지를 보내려는 의도인지 모르겠다”면서도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통해 로켓·미사일 시험은 생산적인 조치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발신했다”고 덧붙였다. 또 볼턴 보좌관이 전면에 나서면서 트럼프 행정부의 입장이 강경해진 것 아니냐는 지적에 “처음부터 미국의 입장은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FFVD)’였다”고 반박했다. 아울러 비건 대표는 지난 25년 동안의 비핵화 협상이 실패해 왔음을 언급하면서 “1992년 남북이 한반도에서 핵개발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얻은 성과를 부인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볼턴 보좌관이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는 92년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을 뜻하는 것으로, 북한의 포괄적 핵포기를 재차 촉구하는 메시지로 해석된다.
비건 대표는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영변 핵시설의 부분적인 비핵화와 미국의 제재 해제를 맞교환하지 않은 것과 관련해 “제재를 해제할 경우 북한이 신고하지 않았거나 (비핵화 대상에서 제외하고) 남긴 대량살상무기(WMD) 프로그램을 발전시키는데 직접 보조금을 주는 꼴이 된다”고 주장했다. 완전한 비핵화 조치가 이뤄지기 전에 북한에 지급되는 자금이 핵·미사일·생화학무기 등 개발에 사용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한 것이다. 비건 대표의 이런 인식은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비건 대표는 또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영변 핵시설의 개념을 놓고 북·미 간 인식차가 있었음을 시인했다. 그는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영변 핵시설 폐기와 관련해 어떠한 합의에 달하지 못했다”면서 “영변은 많은 다른 것들을 의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비핵화 과정에서 북한에 요구하는 것은 핵연료 사이클과 핵무기 프로그램의 모든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라며 “핵무기 위협을 제거하면서 생화학무기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핵무기·핵물질은 물론 미사일과 생화학무기를 포함한 모든 WMD 폐기가 비핵화 목표라는 점을 재확인한 것이다.
한국 정부도 미국 정부와 마찬가지로 비핵화 일괄 타결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한·미가 로드맵과 협상 전략을 짜는데 있어 긴밀히 협의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한·미 간 이견이 없다는 설명을 곧이 믿기 힘들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