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하원이 아무런 합의 없이 유럽연합(EU)을 떠나는 ‘노딜(no deal) 브렉시트’를 거부하면서 당초 3월 29일이었던 브렉시트 시점이 연기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브렉시트 연기 기간을 놓고도 정파별로 입장이 첨예해 영국의 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하원은 13일(현지시간) 노딜 브렉시트에 관한 정부 결의안과 의원 수정안에 대해 각각 표결했다. 먼저 “하원은 어떤 경우에도 영국이 탈퇴협정 및 미래관계 정치선언 없이 EU를 떠나는 것을 거부한다”는 내용의 캐럴라인 스펠맨(보수당)·잭 드로미(노동당) 의원의 수정안이 찬성 312표, 반대 308표의 4표 차로 하원을 통과했다.
테리사 메이 총리는 당초 “의회는 오는 29일 합의 없이 EU를 탈퇴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정부 결의안을 내놓았었다. 다만 노딜 브렉시트 카드를 끝까지 쥐고 싶었던 메이 총리는 “영국과 EU가 합의안을 비준하지 않는다면 노딜 브렉시트가 법적 기본값(legal default)으로 설정된다”는 애매한 조건을 달았다. 이런 정부 결의안에 앞서 스펠맨·드로미 의원의 수정안이 통과되자 메이 총리는 결의안을 “의회는 어떤 경우에도 노딜 브렉시트를 승인하지 않는다”고 급하게 변경해야 되는 상황에 처했다. 메이 총리는 보수당 의원들에게 정부 결의안을 부결시킬 것을 요구했지만 찬성 321표 대 반대 278표로 앞서 통과된 스펠맨·드로미 의원의 수정안보다 큰 표차로 가결되며 또다시 패배를 맛봤다.
다만 하원에서 승인된 스펠맨·드로미 의원의 수정안은 정치적 구속력을 가지지만 법적 구속력까진 없다. 즉 영국과 EU가 모두 영국의 EU 탈퇴 합의안을 비준하지 않거나 영국이 탈퇴를 취소하지 않으면 노딜 브렉시트는 여전히 일어날 수 있다. 메이 총리도 표결 직후 성명에서 “노딜 브렉시트는 합의안을 통과시키거나 브렉시트를 취소해야만 피할 수 있다”고 말했다가 야유를 받기도 했다.
하원에서 노딜 브렉시트를 부결시킴에 따라 예정대로 14일 브렉시트 연기 여부를 묻는 표결이 시행된다. 현재로선 하원의 브렉시트 연기안 수용이 유력하다. 브렉시트 지지파에서도 “나쁜 브렉시트 합의를 하거나, 브렉시트를 하지 않는 것보다 연기를 하는 편이 낫다”는 의견이 많다.
메이 총리의 14일 상정 결의안은 “브렉시트 시기를 6월 30일까지 연기한다. 단 이는 20일까지 하원에서 브렉시트 합의안이 통과됐을 경우에 한한다”와 “20일까지 합의안이 통과되지 못할 경우 브렉시트 연기 기간은 더 길어진다. 이 경우 5월 유럽의회 선거에 참여할 수도 있다”는 게 골자다.
가디언 등 영국 언론은 메이 총리가 브렉시트 합의안을 건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고 평가했다. 집권 보수당은 물론 내각 장관들조차 정부안에 반발하는 등 전례없는 분열이 이어지자 EU 탈퇴 시점을 장기간 늦출 수 있다고 밝힌 것이다. 이는 당내 강경파에게 ‘정부 합의안을 지지하라’는 최후통첩 성격도 있다.
하지만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는 메이 총리의 합의안을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코빈 대표는 “메이 총리 합의안은 이미 하원에서 두 번이나 거절당했다. 그는 더 이상 지도자로서 능력이 없다”고 비판했다.
하원이 14일 브렉시트 연기를 승인하면 영국 정부는 EU에 브렉시트 시점 연기를 요청하고 27개 회원국 모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EU는 오는 21~22일로 예정된 EU 정상회의에서 개정합의안을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EU는 그동안 5월 24~26일 예정된 유럽의회 선거 전까지를 브렉시트 연기 시점으로 밝혀왔지만 유럽의회가 개막하는 7월 2일 이전까지는 늦출 수 있다고 영국 언론은 예상했다. 브렉시트 연기가 확정된 이후 영국에서 조기총선, 제2 국민투표, 재협상 등 여러 시나리오가 거론되지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