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새벽 1시, 서울 송파구 장지동 택배 물류센터에 심야 아르바이트를 하러 온 사람들이 속속 모였다. 일반인들이 자신의 차를 이용해 물건을 배송하고 건수에 따라 돈을 받는 택배 알바 ‘쿠팡 플렉스’ 참여자들이다. 벤츠, 아우디, BMW 등 고가의 외제 차량 여러 대가 눈에 띄었다. 이날 알바를 한 100여명 중 외제차를 끌고 온 이들이 10%가 넘었다.
검은색 레인지로버에서 내린 강모(39)씨는 “오늘 목표는 150개 배송”이라며 트렁크에 택배 상자를 가득 실었다. 그는 직원 40명을 둔 자동차 용품 유통회사 대표다. 한 달에 3000여만원을 벌고 외제차를 4대 갖고 있다. 강씨는 그런데도 지난 8개월간 매주 4차례, 약 30시간을 심야 알바에 썼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데 왜 심야 알바를 하느냐’고 묻자 ‘재밌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골프와 캠핑이 취미였는데 점점 흥미가 떨어졌다”며 “이 일을 하면 시간을 알차게 쓰고 돈도 벌어 좋다”고 했다.
단기 일자리가 늘면서 중소기업 대표, 고소득 직장인도 부업에 뛰어드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고 싶어서’ ‘운동이 돼서’ 등 개인적인 이유로 알바에 참여한다. 근무시간 단축 등으로 줄어든 소득을 벌충하기 위해 ‘투잡’을 뛰는 직장인의 고달픈 모습과는 다르다. ‘긱 이코노미 사회’의 독특한 현상으로 풀이된다.
대기업 5년차 직장인 A씨(32)는 매주 수요일 저녁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열리는 ‘좌담회 참석 알바’에 참석한다. ‘고가 패딩 구매’ ‘부동산 앱 사용’ 등 여러 주제의 좌담회에서 2시간 동안 사람들과 토론을 하면 7만원을 번다. A씨는 19일 “연봉에 한참 못 미치는 돈이지만 평일 저녁시간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고소득자의 알바 참여 이유는 자기만족에 가깝다. 강씨는 “할당받은 물품을 목적지에 배달한 뒤 오는 성취감이 있다”며 “일하고 싶을 때 언제든 할 수 있어 자유롭기도 하다”고 말했다. A씨는 “늘 똑같은 사람을 만나고 비슷한 일을 하다 낯선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어 매력적”이라고 했다. 6개월 전부터 쿠팡 플렉스에 참여해온 신유철(39)씨도 “주소를 찾고 아파트 출입문 비밀번호를 알아낼 땐 마치 ‘방 탈출 게임’을 하는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사업체 두 곳을 운영하는 그는 월 2000만원을 번다.
이들은 30대 미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강씨는 “충분히 여유롭고 행복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A씨도 “좌담회에 참여한 또래 남성 10여명이 모두 미혼이었다”며 “부양 자녀가 없으니 옷, 차에 많이 투자하고 자유롭게 사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개인이 점차 자유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발생하는 현상”이라며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고픈 젊은 세대의 심리가 반영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4차 산업혁명으로 다양한 형태의 일자리는 더욱 늘어날 것”이라며 “경직화된 노동 환경 속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반면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은 “이런 일자리는 상대적으로 돈이 필요한 계층에 더 돌아가야 한다”며 “쉬는 시간까지 일을 해야 맘이 편한, 과잉 노동·소비 사회의 극단적인 면”이라고 했다.
신경아 한림대 교수는 “고소득자가 부업에 뛰어드는 건 극히 일부의 사례다. 긱 이코노미 일자리 대부분은 노동법 보호를 못 받아 열악한 환경”이라고 말했다.
안규영 구승은 기자 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