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발생한 ‘여수·순천사건’(여순사건) 당시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사형당한 민간인 희생자들이 다시 재판을 받고 명예를 회복할 길이 열렸다. 여순사건으로는 첫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지면서 71년 만에 사건의 실체가 재판을 통해 다시 확인될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1일 내란 및 국권문란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고(故) 장모씨 등 3명의 재심 결정에 대한 재항고심에서 대법관 9명의 다수의견(4명 반대의견)으로 재심 개시를 결정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당시 군경에 의한 민간인 체포·감금이 일정한 심사나 조사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고, 장씨 등 연행 과정을 목격한 사람들의 진술도 이에 부합한다”며 재심을 허용한 원심 판단이 정당하다고 밝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결정으로 장씨 등의 재심은 광주지법 순천지원에서 열릴 예정이다.
여순사건은 1948년 여수와 순천 지역에 주둔하던 14연대 군인들이 제주 4·3사건을 진압하라는 지시를 거부하면서 촉발됐다. 당시 국군은 순천을 탈환한 뒤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민간인들을 불법 체포해 재판에 넘긴 뒤 곧바로 사형을 집행했다. 당시 이들이 받은 수사 절차나 재판 기록 등은 물론 법원 판결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여순사건을 조사해 당시 군경이 438명의 순천지역 민간인을 내란 혐의로 무리하게 연행해 살해했다고 인정했다. 장씨 유족 등은 2013년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이날 전원합의체에서는 당시 판결문이 없어 재심 대상 판결이 존재하지 않고 재심 사유도 확인할 수 없다는 반대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견은 “판결문이 판결 그 자체인 것은 아니다. 판결문이 작성되지 않았거나 작성된 후 사라졌더라도 선고된 이상 판결은 성립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 판결문 원본의 작성과 보존은 국가가 책임질 부분이라고도 설명했다.
1, 2심은 “장씨 등이 법원이 발부한 사전·사후 구속영장 없이 불법적으로 체포·감금됐다고 볼 수 있다”며 이들의 재심 청구가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지난해 12월 이 사건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고려해 전원합의체에 회부했다.
안대용 기자 dand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