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은 시대다] 땅속의 땅콩들이 온몸으로 그려낸 인디의 애국가


 
1990년대 후반에 등장한 밴드 크라잉넛은 직설적인 노래와 화끈한 무대를 내세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왼쪽부터 밴드 멤버인 김인수 한경록 박윤식 이상혁 이상면. 뉴시스
 
크라잉넛이 밴드 옐로우키친과 함께 낸 ‘아워 네이션 볼륨 1’ 음반 재킷. 뉴시스


문화가 산업의 영역으로 편입된 20세기 자본주의 시대에 이르러 문화 헤게모니는 19세기의 천재적 예술가에서 탐욕스러운 대자본으로 이동했다. 모든 창조적인 재능은 대량 복제된 상품의 형태로 변모됐으며, 시장의 이윤을 창출하는 도구로 전환하게 됐다.

대자본에 바탕을 둔 문화적 생산력은 순식간에 대중적인 영향력을 확산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과학기술혁명의 산물인 라디오와 TV 같은 전파 매체의 급속한 성장과 보조를 맞추며 수천년 동안 진행돼온 인류의 문화적 관습을 일거에 바꿔 버리는 가공할 만한 위력을 발휘했다. 매스 미디어 체제에서 한 인간의 재능은 중요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대자본의 시스템이 지배하는, 한마디로 컨베이어 공정의 세상이 된 것이다.

한국 인디 음악의 탄생 스토리

인류의 문화사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대자본의 이윤동기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인간 고유의 욕망은 예술의 독립을 꿈꾸게 만들었다. 그것은 1950년대 미국의 변방에서 ‘인디 레이블’이라는 하나의 해방구를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흑인 거주지역의 리듬앤드블루스, 그리고 백인 거주지의 로큰롤은 바로 이 인디 레이블이 낳은 혁명적인 이름이다. 언더그라운드보다 훨씬 집약적인 표현인 ‘인디(indie)’는 그렇게 태어났다. ‘인디펜던트(independent)’라는 형용사의 약어인 인디는 말할 것도 없이 ‘대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뜻하는, 자본주의 문화산업 안의 게릴라 정신을 가리킨다. 이들은 시장은 승인하지만 시장 논리는 승인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머리와 손에서 만들어지는 문화의 주인이 온전히 자기 자신이기를 주장한다. 그리고 자신의 창작 동기가 자신의 밖에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에서 생성되기를 희망한다. 즉, 인디는 버림받은 무명 청년들의 자학적인 몸부림이 아니다. 그런 자들은 그냥 무명의, 재능 없는, 자신의 철학도 가지지 못한 자들이다.

로큰롤은 이미 60년대 초반부터 한국에 상륙했지만 그것은 하나의 ‘패션’으로 작동할 뿐이었다. 그것은 ‘정신’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부터 한국의 언더그라운드는 엄격하게 통제되는 중앙집권적인 문화 시스템에서 탄생할 수 있는 ‘조건’조차도 가져보지 못했다. 그것은 해방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눈금 밖으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순간 그것은 불온의 낙인이 찍혀야 했다. 모든 문화는 체제 순응적이어야 했다. 자발적인 하위문화들은 ‘검열’의 벽에 막혀 결코 시장으로 진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적어도 우리 불우한 조국에서, ‘언더그라운드’라는 말은 비밀결사적인 향기를 뿜어냈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인디는 김민기의 78년 불법 프로젝트 ‘공장의 불빛’의 정신을 계승한 80년대 대학 운동권의 불법적인 노래운동 테이프들, 전투경찰의 공격에 대응해 쇠파이프로 무장하고 관람해야 했던 독립영화들이 그 원형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전투적인 혁명의 무기들은 시장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반자본주의적 봉기였으므로 민중운동이 퇴조하는 90년대에 이르러 무장 해제 되고 만다. 이들이 남긴 빈 공간에 인디가 하나의 문화적인 콘셉트로 자리 잡는 데엔 수많은 희생이 필요했다.

그 희생을 바탕으로 이 땅의 상상력을 목졸라온 기만적인 사전심의 제도가 무너지고 표현의 자유가 승리를 거둔 96년부터, 20세기가 저무는 그 시점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다양한 표현의 가능성들을 합법적으로 접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됐다. 그렇지 않았다면 ‘황신혜 밴드’ ‘불타는 화양리 쇼바를 올려라’ ‘내 귀에 도청장치’ ‘삼청교육대’ 같은, 이런 발칙한 밴드의 이름들을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는가.

붕어빵 같은 브라운관 스타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이들의 자유분방함과 생명력은 오직 이 순간을 연소하는 현재의 젊음이며 미래의 머나먼 약속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양성과 개성이 개화하기 시작한 90년대 한국 대중문화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했다.

인디의 인프라는 다름 아닌 동네의 소규모 클럽이었다. 헌법재판소가 검열을 철폐시켰다고는 해도 클럽은 여전히 식품위생법을 위반하는, 불법적인 공간 정도로 치부되고 있었다. 밴드 규모의 연주는 엄청난 세율을 적용하는 나이트클럽이나 룸살롱 같은 유흥음식점에서만 허용됐던 것이다. 하지만 가수 출신의 민주당 초선 의원이었던 최희준의 노력으로 98년 마침내 라이브 클럽 합법화가 국회에서 이루어졌다.

90년대 중반 한국에서의 인디 문화 성립은 이상의 전제들을 바탕으로 출발한다. 첫 번째는 96년 정태춘의 단독 투쟁에 의해 63년 만에 획득된 표현의 자유였다. 정치적 검열이 철폐되면서 자유분방한 표현 욕구가 표층을 뚫고 지상으로 분출될 기회를 획득했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자연발생적인 소자본에 의한 클럽 커뮤니티의 형성이다. 이 인프라가 마련됨으로써 지하 연습실, 혹은 개인 스튜디오에 고립됐던 비주류 뮤지션들의 좌충우돌적인 상상력과 날것의 오리지널리티를 찾던 소수의 청년 수용자들이 항상적으로 조우할 수 있는 기회가 기적적으로 마련됐다. 세 번째는 기존의 음반사 등록법의 배타적 조항을 교묘히 피해 나간 인디 레이블 ‘인디’의 등장과 여타 인디 프로덕션의 출현이었다.

땅콩들의 등장

‘울부짖는 땅콩들’이라는 뜻의 ‘크라잉넛’은 한국 클럽 문화의 상징이 된 서울 홍대앞 거리의 선두주자 ‘드럭’이 배출한 최초의 인기 펑크 밴드였다. 또 다른 하우스 밴드였던 ‘옐로우키친’과 호흡을 맞춰 97년 발표한 드럭 앨범 ‘아워 네이션 볼륨 1(Our Nation vol.1)’의 수록곡 ‘말달리자’는 음반이 발매되기 전부터 이미 클럽 펑크의 ‘고전’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드럭의 주인인 이석문 대표의 말을 빌자면, “어느 날 땅꼬마 넷이 쪼르르 와서 무대에 세워달라고 마구 졸랐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이들의 데뷔였던 셈이다. 멤버인 박윤식과 이상면 두 기타리스트를 중심으로, 키보드와 아코디언으로 라이브에서 코믹한 퍼포먼스를 만들어내는 김인수, 이상면과 형제인 드러머 이상혁,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 밴드의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한 베이시스트 한경록으로 이루어진 5인조 밴드 크라잉넛은 신선하고 열정적인 스테이지로 일약 홍대의 영웅이 됐다.

‘말달리자’는 기성세대의 억압 아래 신음하고 있던 10대 후반과 20대 청년들의 본능적인 분노를 대변하는 노래로 자리매김했다. 홍대 인디는 홍대 거리를 넘어 시장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문법은 은유를 배제한 직설에 바탕을 두고 결론 없는 혼란에 바로 뛰어든다.

“모든 것은 막혀 있어/ 우리에겐 힘이 없지/ 닥쳐!/ 사랑은 어려운 거야/ 복잡하고 예쁜 거지/ 잊으려면 잊혀질까/ 상처받기 쉬운 거야/ 닥쳐!”

옐로우키친과 함께한 조인트 앨범의 성공은 바로 이듬해인 98년 정규 데뷔 앨범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등장한 ‘노브레인’과 함께 한국 인디의 쌍두마차가 됐다. 데뷔 앨범의 13개 트랙에서는 갓 잡아올린 물고기 같은 싱싱함을 느낄 수 있었다. ‘묘비명’의 단호한 의지에서 ‘싸나이’의 건들거리는 생동감까지, 이들은 한순간도 멈춰 서는 법이 없었다. 전후의 비트 세대들은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고 소리쳤지만 크라잉넛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크라잉넛을 필두로 한 세기말의 한국 펑크 밴드들은 뒤돌아보지 않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자본주의에서 자본만큼 현명한 기획자는 없다. 자본가들은 조용필로 대표되는 주류와 들국화가 대변하는 비주류 진영과의 조화가 빛났던 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이 성취한 천신만고의 성공을 90년대에 이르러 처참하게 배신했다. 이 천민적 자본 논리는 돈이 될 것 같아 너도나도 뛰어들기 시작한 대기업 자본과 코스닥 상장 효과를 노린 투기성 자본의 진출 장단에 이성을 잃고 음반산업이라는 거위의 배를 갈랐다.

오로지 이윤의 머니 게임에 골몰한 그들은 뮤지션십을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장기적인 투자와 뮤지션을 발굴해내는 일에도 관심이 없었다. 한국 음반산업은 뿌리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밀리언셀러 놀음은 인터넷 확산과 더불어 일어난 불법 다운로드와 IMF 구제 금융의 불황 앞에서 마침내 붕괴한다. 메이저 레이블들은 속속 도산했지만 이들에게 파산과 몰락을 안겨다 준 애물단지 댄스그룹은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K팝의 전사로 다시 태어난다. 세계 음반산업의 틈새시장을 치밀하게 파고듦으로써 SM엔터테인먼트를 위시한 한국 음반산업의 신주류 레이블들은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탈출하는 마법을 펼쳐보인 것이다.

70년대 최악의 실업률 속에서 부상한 영국의 펑크는 뉴웨이브나 포스트 펑크, 혹은 얼터너티브로 진화하는 미학적 생존을 보여주었지만 일천한 뿌리를 지닌 한국 홍대 인디 펑크는 미디어의 외면과 치솟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시장에서 전사한다. 1인 밴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이진원의 가난한 돌연사는 한국 인디의 불행한 추락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크라잉넛은 20년이 넘도록 아직도 홍대 인디의 낡은 깃발을 씩씩하게 지키고 있다. 이 모든 초라함에도 불구하고 인디 문화는 잠수함 속의 토끼와 같다. 이것은 오버그라운드 문화가 거품 같은 소모전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어한다. 또한 그것은 가난한 신념이자 오만한 몽상이며 자본과 거대 매체의 권력에 대한 왜소한 예술가의 가혹한 현실 투쟁이다.

강헌<음악평론가>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