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에서 침몰 위기에 몰렸던 난민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준 상선을 납치했다. 최악의 인권유린이 자행되는 리비아 난민수용소로 돌아가지 않으려 벌인 일이다. 유럽연합(EU) 내 반이민 정책을 주도하는 이탈리아 등이 이를 “해적 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EU의 인도주의적 난민 정책이 또 한번 위축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터키에서 출항한 팔라우 선적 상선 엘히블루 1호는 26일 밤(현지시간) 리비아 해안에서 보트에 타고 있던 난민 108명을 구조했다. 엘히블루 1호는 난민들을 태우고 트리폴리로 향하다 항구에서 불과 11㎞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선수를 북쪽으로 틀었다. 선장은 이후 몰타 당국과의 교신에서 “배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나와 선원들은 난민들의 강요와 위협을 받아 몰타를 향해 항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난민 일행 중에는 성인 남성만 77명에 달해 12명에 불과한 선원들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몰타 당국은 27일 오전 영해로 진입하려던 엘히블루 1호를 멈춰 세운 후 선박 점거에 성공했다. 몰타 당국은 모든 선원과 난민들을 조사할 예정이다.
엘히블루 1호 납치 사건이 전해지자 유럽 내 반이민 정책을 주도하는 마테오 살비니 이탈리아 부총리는 “이들은 조난당한 난민이 아니라 해적”이라고 비판했다. 살비니 부총리는 특히 난민들을 태운 배를 이탈리아에 들이지 않겠다며 “그들은 망원경을 통해서만 이탈리아를 보게 될 것이다. 해적들에게 말한다. 이탈리아는 잊어라”고 말했다. 몰타군 대변인도 “몰타 당국은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으며, 이 배가 몰타에 입항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사건으로 EU의 인도주의적 조치가 더 축소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EU는 27일 난민구조 프로그램 ‘소피아 작전’을 중단하기로 했다. 소피아 작전은 당초 밀입국 및 인신매매 단속을 위해 출범했으나 현재 뗏목이나 낡은 배 등에 의지해 지중해를 건너는 밀입국 난민들을 구조하는 활동을 주로 하고 있다. 2015년 8월 독일 구축함에서 태어난 소말리아 난민 소녀의 이름을 땄다. 소피아 작전을 통해 구조된 난민은 지금까지 4만5000명에 달한다. 항공기 5대와 헬기,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이 제공한 선박 3척이 구조 임무를 맡고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가 최근 소피아 작전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해상순찰을 중단하고 항공순찰만 9월 말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난민들을 태운 뗏목이 침몰 위기에 내몰려도 더 이상 구조선을 파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국제사면위원회는 성명을 통해 “이 부끄러운 결정은 EU 정부의 책임을 터무니없이 포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난민들의 행위를 해적 행위로 정의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난민들은 리비아에 도착하면 이주민 수용소로 보내진다.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 퇴진 이후 무법천지가 된 리비아 수용소에서는 성폭행과 강제노동 등 인권 유린이 만연해 있다. 국제구호단체들은 이번 사건을 해적 행위가 아니라 난민들이 수용소로 돌아갈 것이라는 절망감 속에 어쩔 수 없이 벌인 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EU가 난민들에게 망명 기회를 주고 인명을 구조하는 데 힘쓰는 대신에 그들이 바다에서 죽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는 것이 다시 한번 증명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구조선을 운영하는 민간단체 메디테리니언 세이빙 라이프는 “어떤 국가도 난민들을 추방하거나 그들의 삶과 자유를 위협하는 나라로 추방할 수 없다”며 “우리가 지옥에서 도망치는 인간들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11월에도 고무보트를 건너던 난민 80여명이 파나마 선박에 구조돼 리비아로 송환됐다. 당시 난민들은 리비아 미스라타항에 정박한 배 안에서 “리비아로 돌아가느니 죽겠다”며 11일간 버텼다. 하지만 결국 리비아군에 의해 강제로 하선당했다.
이택현 기자 alle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