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바키아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대통령이 당선됐다. 한때 인종주의와 포퓰리즘, 부정부패로 몸살을 앓던 슬로바키아에 변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유럽 전역을 휩쓸던 극우정당의 약진에 제동을 거는 의미도 있다.
A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30일(현지시간) 열린 슬로바키아 대선 결선투표에서 진보정당 ‘진보적 슬로바키아’ 소속 주사나 카푸토바(45·사진) 후보가 58%를 득표해 당선이 확정됐다. 연립정부 여당 사회민주당(Smer-SD) 소속 마로스 세프쇼비치 후보는 42%에 그쳤다. 세프쇼비치는 표차가 벌어지자 일찌감치 패배를 인정하고 카푸토바의 당선을 축하했다.
카푸토바는 환호하는 지지자들에게 “지금까지 정치에서 정의와 공정은 나약함의 상징으로 여겨진 것 같다”면서 “하지만 이것들이 사실은 우리의 힘이었음을 오늘 목격했다. 보수와 진보 사이의 장벽이 강고해 보였지만 우리는 그것을 무너뜨렸다”고 말했다.
변호사이자 환경운동가인 카푸토바는 정치 경험이 거의 없는 신인에 속한다. 소속 정당 역시 총선 한 번 치러본 적 없는 신생 정당이다. 카푸토바는 고향 페지노크에서 벌어진 유독성 폐기물 투기 사건을 둘러싼 법정 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주목받은 인물이다. 그는 이 공로로 2016년 ‘녹색 노벨상’으로 불리는 골드만 환경상을 수상했다.
카푸토바는 언론 인터뷰에서 언론인 잔 쿠치악 피살사건을 접하기 전까지는 공직 출마 의사가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탐사전문기자 쿠치악은 슬로바키아 정치권과 이탈리아 마피아 간 유착 의혹을 취재하던 중 지난해 2월 약혼자와 함께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89년 구 체코슬로바키아 공산 정권을 무너뜨린 ‘벨벳 혁명’ 이후 최대 규모 시위가 벌어지는 등 부패 척결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로베르토 피초 전 총리가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피초 전 총리는 사회민주당 당수직을 유지하며 여전히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비난을 받았다.
카푸토바는 선거 기간 “악과 함께 맞서 싸우자”는 슬로건을 내세워 시민들의 호응을 받았다. 상대 진영은 지지층 결집을 위해 난민 혐오와 반(反)EU 등 선동적인 구호를 서슴지 않았지만 패배를 막지 못했다. 슬로바키아에서 정치적 실권은 대통령이 아닌 총리에게 있다. 다만 대통령도 내각 구성 승인권과 헌법재판소 재판관 임명권, 법률 거부권 등 핵심 권한도 일부 보유하고 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