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의 완전한 미국 이전을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핵프로그램의 포괄적 신고와 국제 사찰단의 완전한 접근, 북한 핵 과학자의 직업 전환 등을 촉구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에서도 북한을 패전국처럼 대한 이런 요구사항을 트럼프 행정부가 들고 나갔다면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은 불가피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북한이 비핵화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는 대북 제재와 관련해서도 뚜렷한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11일 워싱턴에서 개최될 한·미 정상회담에서 향후 대북 제재의 방향과 수위가 결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로이터통신은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건넸다는 이른바 ‘빅딜 문서’의 일부를 입수했다고 30일(이하 현지시간) 보도했다. 로이터는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핵무기와 핵물질을 미국에 넘길 것을 요구했다”고 전했다. 미국은 이와 별도로 4가지 핵심사항을 북한에 요구했다. 핵 프로그램에 대한 포괄적 신고와 미국·국제 사찰단의 완전한 접근, 모든 핵 관련 활동과 새 시설물 건설 중단, 모든 핵 관련 인프라 제거, 핵 프로그램 과학자와 기술자의 상업 활동으로의 전환이 비핵화 빅딜 문서에 남긴 4대 요구사항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북한 핵시설·생화학무기 프로그램·탄도미사일과 발사대 등의 완전한 해체를 촉구했다. 미국의 요구는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대표되는 강경파가 주장한 ‘리비아식 해법’을 따른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완전한 핵 폐기와 검증을 거쳐 수교와 경제 지원 등 보상책을 제공하는 리비아식 해법 제안에 대해 모욕감을 느꼈고, 요구 자체를 도발적으로 생각했을 것이라고 로이터는 지적했다.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이 하노이 결렬 이유로 “미국의 강도 같은 태도”를 들고 나왔던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미국이 핵 과학자와 기술자의 상업활동 전환을 꼭 집어 요구한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이는 미국이 구소련 해체 이후 핵 과학자들이 제3국이나 테러 집단과 손 잡는 것을 막기 위해 펼쳤던 정책이다. 핵 과학자들을 다른 산업 분야로 재교육시켜 핵 개발의 뿌리를 뽑겠다는 의도다. 미국 싱크탱크 스팀슨센터의 제니 타운 연구원은 “미국의 요구는 그동안 몇 차례나 북한으로부터 거절당했던 것이라 처음부터 합의 가능성이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29일 플로리다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북한 사람들은 굉장히 고통받고 있다”면서 “나는 현 시점에서 추가적인 대북 제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나중에 제재를 부과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고 압박했다. 북한이 인공위성 발사 등 도발을 취할 경우 추가 제재를 취하겠다는 경고도 빼놓지 않은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나는 김정은 위원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과의 톱다운 방식 해결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은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에는 유화적 신호를 보내지만 남북 경협에 대해선 탐탁지 않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면서 “북한은 한·미가 정상회담에서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에 대해 어떤 합의를 이끌어내는지 지켜본 뒤 움직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