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9일(현지시간)은 원래 브렉시트, 즉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가 예정됐던 날이었다. 하지만 이날 영국 하원은 테리사 메이 총리가 세 번째 표결을 시도한 EU 탈퇴협정을 찬성 286표, 반대 344표로 부결시켰다. 결국 영국은 4월 12일 아무런 합의 없이 EU를 떠나는 ‘노딜 브렉시트’ 또는 ‘브렉시트 장기 연기’를 선택해야 한다. 영국에서는 노딜 브렉시트의 현실화에 대한 공포가 높아지는 가운데 메이 총리 내각의 붕괴 가능성까지 제기되는 등 국가적 혼란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이날 영국 전역에서는 브렉시트 찬성파와 반대파가 나뉘어 시위를 벌였다. 당초 브렉시트 예정일이었던 만큼 런던의 의회 밖에서는 브렉시트 찬성파 수천명이 “약속을 지켜라”고 요구했다. 런던 세인트 판크라스역에서는 브렉시트 시위로 영국과 유럽을 잇는 특급열차 유로스타의 운행이 12시간 넘게 중단됐다. BBC는 브렉시트를 지지하는 남성이 잉글랜드 국기를 두른 채 역사 지붕에 올라가면서 열차의 운행이 잇따라 취소돼 수천명이 피해를 입었다고 보도했다.
반면 영국령 북아일랜드에서는 브렉시트 반대파 수천명이 국경 곳곳에서 “EU에 남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영국에선 최근 주말마다 곳곳에서 브렉시트 시위가 열린다. 지난 23일엔 100만명이 참여한 역대 최대 규모 시위도 열렸다. 참가자들은 브렉시트 반대와 제2 국민투표를 외쳤다. 최근 영국 여론조사에서는 ‘EU 잔류 지지’가 54%를 차지, ‘브렉시트 지지’ 46%를 압도하고 있다. 영국 의회의 브렉시트 취소 청원도 10일 만에 600만명을 넘어섰다.
영국은 2016년 6월 23일 국민투표를 통해 51.9%(탈퇴) 대 48.1%(잔류)로 탈퇴를 결정했다. 영국 정부는 2017년 3월 29일 EU에 탈퇴 의사를 공식 통보한 뒤 17개월에 걸친 협상 끝에 합의안을 도출했다. 그러나 영국 하원이 승인투표에서 두 차례 부결시키면서 제동이 걸렸다. 브렉시트는 ‘의회 민주주의의 발상지’로 자부해온 영국 정치권의 민낯을 전 세계에 보여줬다. EU는 지난 22일 탈퇴협정 가결을 전제로 브렉시트 시한을 5월 22일까지 연장해주기로 양보했다. 다만 부결 시엔 4월 12일까지 노딜 브렉시트 또는 5월 말 유럽의회 선거 참여를 전제로 한 브렉시트 장기 연기를 제시했다.
영국 하원은 1일 다시 한 번 의향투표를 실시한다. 의향투표란 하원의 과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브렉시트 방안을 찾을 때까지 제안된 여러 옵션에 대해 투표하는 것이다. 가디언 등 영국 언론은 하원이 다시 의향투표를 하더라도 정파별로 입장이 워낙 다르고 양보를 하지 않는 만큼 대안을 찾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더선데이타임스는 “메이 총리가 브렉시트 합의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키지 못하면 내각이 총체적으로 붕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메이 총리가 합의 없이 EU를 떠나는 노딜 브렉시트를 선택하면 브렉시트 온건파 장관들이 사임하고, EU 관세 동맹 잔류 결정을 내리면 브렉시트 강경파 장관들이 사임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네 번째 하원 승인 투표가 부결될 경우 조기 총선 목소리가 커질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정치 지형에서는 도저히 합의점에 이르기 어려운 만큼 아예 새 판을 짜야 한다는 여론이 높기 때문이다. 그동안 제1야당인 노동당의 제러미 코빈 대표가 조기 총선을 요구해 왔지만 메이 총리와 보수당은 반대해 왔다. 벼랑끝에 몰린 메이 총리나 보수당이 전격적으로 조기 총선 카드를 꺼낼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데일리메일은 이르면 3일 하원에서 조기 총선 여부를 묻는 투표가 이뤄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데일리메일이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야당인 노동당에 대한 지지율이 보수당보다 5% 포인트 높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