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대 예술대학 교수인 정연두(50)는 ‘미술 좀 아는 사람’에게는 꽤 알려진 작가다. 사진·영상작업을 주로 하는데, 대한민국 중산층의 욕망을 획일적인 거실 풍경을 통해 보여주는 ‘상록 타워’로 강한 인상을 줬다.
그가 서울 서초구 페리지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하기에 최근 전시장에서 작가를 만났다. ‘지금, 여기’(5월 11일까지)라는 전시 제목에 솔깃했던 터였다. 그런데, 대형 영상 채널 3대가 놓인 전시장에는 일본인들이 등장하는 게 아닌가. 그중 하나에선 2차 대전 당시 도쿄 대공습에 대한 유년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할아버지가 나왔다. 순간, 속은 기분이 들었다. 내게 ‘지금, 여기’는 늘 한국이었기 때문이다. 전범 국가인 일본을 은연중에 피해자로 바라보도록 유도하는 것 같이 불편한 감정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고전과 신작(Classic and New)’이란 제목의 43분 42초짜리 영상 작품을 보면서 일본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부터 갖는 이분법적 사고를 돌아보게 됐다.
영상 작품의 무대는 도쿄다. 3개의 채널에는 도쿄가 소이탄 공습으로 불바다가 됐던 10살 때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와케베 토시히로 노인, 와케베 노인이 그런 경험을 했던 때와 같은 나이인 현재의 초등 4학년생들, 그리고 일본판 만담가라 할 수 있는 라쿠고(落語) 명인이 각각 등장한다. 전혀 다른 시기, 다른 순간에 촬영했다. 그런데도 한군데 모아놓고 보니 생판 모르는 사람끼리 만나서 대화하는 것 같은 효과를 낸다.
이를테면 라쿠고 명인이 한자(漢子)에 관해 이야기할 때, 다른 채널에선 아이들이 서예 교실에서 ‘연다’는 뜻의 한자 ‘개(開)’를 쓰고 있다. 또 다른 채널에선 와케베 할아버지가 문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소이탄이 터졌을 때 누나의 손을 잡고 마지막으로 방공호에 뛰어 들어갔고, 닫힌 문밖에서는 열어달라는 아우성이 있었다고.
또 와케베 할아버지가 공습경보를 피해 밤에 엄마랑 강가로 대피하러 갔다가 처음 본 반딧불이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이야기할 때는 다른 채널에서 학생들이 과학교실에서 영롱한 비눗방울을 날리고 있다. 와케베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회상하는 장면에선 초등학생들이 미술수업 시간에 그린 자신들의 할아버지 얼굴을 들고 나와 소개한다. 한 소년이 “아빠가 나이가 많아 할아버지 대신 아빠를 그렸다”고 설명하는 장면에선 웃음이 ‘빵’ 터진다.
불편한 한일 관계에 대한 프레임만 없다면 어느 나라에나 있을 법한, 할아버지 세대와 손자 세대 간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할아버지 어렸을 적에는 말이야…’ 식의 이야기는 얼마나 고리타분한가.
“공감에 대해 생각해봤어요. 사실 기성세대의 말에 귀 기울이기는 쉽지 않잖아요. 하지만 할아버지도 아이였다는 걸 실감하게 되면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되지요.”
작가의 얘기다. 지금의 아이 세대, 한때 아이였던 기성세대, 그리고 아이를 소재로 이야기하는 만담가. 아이를 공통분모로 해서 전개되는 3개의 채널 영상을 통해 작가는 다른 세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만들고 세대가 연결돼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번 전시를 바라보게 하는 또 다른 층위가 있다. 이 작품은 도쿄도립현대미술관의 히로미 키타자와 학예사가 재개관전에 선보이고 싶다며 그에게 제안해 제작됐다. 지난달 말 이 미술관의 재개관전이 열렸으니 작품은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상영 중인 셈이 됐다.
히로미씨는 정 작가가 2016년 홍콩의 한 레지던시에 머물 때 제작한 작품에 반해 제작을 의뢰했다. ‘높은 굽을 신은 소녀’라는 채널 2개짜리 영상 작품인데, 1958년 23세에 중국에서 홍콩으로 밀입국한 뒤 산전수전 다 겪은 문씨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키가 굉장히 작은 문씨 할머니는 방직공장에서 일할 때 기계에 손이 닿지 않아 굽이 높은 신을 신어야 했다. 그녀가 구술하는 신산했던 삶은 한문으로 옮겨진다. 그 문장이 천위에 ‘드르륵∼’ 기계 자수로 새겨지는 게 우선 눈길을 끈다. 마치 서예를 하듯 재봉틀로 글씨를 쓴다.
또 다른 채널에는 스스로 키가 작다고 생각하는 홍콩 여성 4명이 등장한다. 이 아가씨들은 할머니의 삶이 연상될 수 있는 장소에서 자신의 현재를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할머니가 식모살이의 어려움을 이야기할 때는 지금의 빨래방이 나온다. 모든 게 키와 연관돼 있다. 춤을 잘 추는 한 아가씨는 키가 작아 뭐라도 증명해야 할 거 같아 춤을 잘 추게 됐다고 한다.
지금의 23살 아가씨들의 키에 대해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장면은 문씨 할머니의 ‘흘러간 노래’ 같은 서사에 파릇파릇 새순 같은 생기를 준다. 그래서 문씨 할머니의 무거운 고생담조차 귀 기울여 다시 듣게 한다. 이렇게 낡은 것도 새것 같은 이야기가 된다.
소이탄 공습으로 불바다가 됐던 도쿄의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를 일본 큐레이터가 굳이 한국 작가 정연두에게 부탁했던 것은 그래서가 아닐까. ‘꼰대’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는, 험난한 근현대사를 통과해온 조부모 세대의 이야기를 손자 세대에게 전하게 하는 재주를 그에게서 봤을 것이다. 예술의 힘은 국경을 넘는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