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에서 압델 파타 엘시시(65)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안이 국민투표를 통과했다. 2011년 ‘현대판 파라오’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을 몰아냈던 이집트에서 또다시 장기독재가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일고 있다.
CNN은 20~22일 이집트 전역에서 실시된 헌법 개정안 국민투표가 유권자 약 6100만명 가운데 투표율 44.33%, 찬성 88.83%로 확정됐다는 선거관리위원회의 발표를 2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번 개헌안의 핵심은 대통령 임기를 현행 4년에서 6년으로 늘리고 세 차례 연임을 허용하는 것이다. 지난해 3월 재선에 성공한 엘시시 대통령의 임기는 애초 2022년까지였지만 헌법 개정으로 임기가 2024년까지 연장됐고 차기 대선에서도 승리하면 2030년까지 합법적으로 집권할 수 있다.
군 출신인 엘시시 대통령은 국방부 장관이었던 2013년 7월 쿠데타를 통해 첫 민선 대통령인 무함마드 무르시를 축출했다. 이듬해 선거를 통해 권좌에 오른 뒤 이슬람조직인 무슬림형제단을 테러조직으로 지정하는 등 권위주의적 통치를 이어왔다. 이집트에서는 2014년 군부 퇴진 운동을 벌인 무슬림형제단 600여명에게 사형이 선고됐고, 2017년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테러 위협 등을 이유로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돼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엘시시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에서 96%의 득표율로 연임에 성공했다.
이번 개헌안은 부통령직 신설, 하원의석 25%에 여성의원 배정 등의 내용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대통령 권력을 과도하게 강화하고 있다. 대통령이 대법관들을 모두 임명할 수 있도록 했고, 180명으로 구성된 상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지명할 수 있도록 했다. 군 역할엔 국가 수호 외에 ‘헌법과 민주주의 보호’를 추가했는데, 군의 정치 간섭을 사실상 허용한 셈이다.
이번 개헌 이후 이집트의 민주주의를 확산시킨 ‘아랍의 봄’이 사실상 끝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과거 30년간 이집트를 철권통치한 무바라크 전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아랍의 봄’ 이전으로 회귀했기 때문이다. 엘시시 대통령에 대한 권력집중 양상은 무바라크 정권 당시와 매우 유사하다.
개헌안이 손쉽게 국민투표를 통과했다고는 하지만 유권자들의 참여는 그리 뜨겁지 않았다. 지난해 3월 대선 투표율 41%보다 3% 포인트 높지만, 여전히 50%를 밑돌았다. 최근 물가 급등과 권위주의 리더십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투표율에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그나마 투표율이 엘시시 정권의 지지도를 가늠하는 잣대가 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친정부 성향의 기업 등이 유권자들에게 차량, 음식, 식품바우처를 무상제공한 덕분에 올라간 것이다.
AP통신은 “유권자들이 투표소에서 기름과 쌀, 설탕 등 음식 꾸러미를 건네받는 모습이 흔하게 눈에 띄었다”면서 “이런 노골적인 불법 투표 관행은 2011년부터 이집트 선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라고 전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