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첫 대외행보에 나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첫 러시아 방문임에도 시종일관 여유로운 모습을 드러냈다. 북·미 회담은 결렬됐지만 자신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는 점을 미국과 국제사회에 과시하기 위한 차원으로 해석된다.
김 위원장을 태운 녹색 전용열차는 현지시간으로 24일 오후 6시쯤 블라디보스토크역 플랫폼에 도착했다. 김 위원장은 열차가 정차한 지 2분 만에 환한 웃음과 함께 나타났다. 검은색 코트에 검은색 중절모를 쓴 김 위원장은 플랫폼에서 환영나온 러시아 정부 관계자들과 악수한 뒤 곧바로 역사로 들어갔다. 김 위원장은 러시아측 인사들과 대화할 때마다 큰 웃음을 짓는 등 내내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김 위원장은 역사 앞 도로에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했다. 현지 군악대가 북한 국가를 연주할 때와 의장대를 사열할 때 김 위원장은 쓰고 있던 중절모를 손에 들고 예의를 갖췄다.
그는 15분여의 짧은 환영식을 뒤로한 뒤 전용차에 올라 숙소인 극동연방대학으로 이동해 여장을 풀었다. 북·미 정상회담이나 남북 정상회담 때처럼 이번에도 김 위원장 동선을 따라 ‘방탄 경호단’이 근접경호를 했다.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설 때는 북한 측 인사 두 명이 달려와 김 위원장이 하차할 출입문을 하얀 수건으로 쉴 새 없이 닦는 모습이 현지 언론에 포착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이날 저녁 예상됐던 러시아 측과의 공동 만찬은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김 위원장과 만찬을 함께할 것으로 알려졌던 유리 트루트네프 부총리가 동시베리아 자바이칼리예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 현장으로 달려갔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숙소에서 다음 날 열리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블라디보스토크 도착에 앞서 김 위원장 전용열차는 오전 10시30분 북·러 국경을 넘어 연해주 하산역에 정차했다. 김 위원장은 하산역에 영접 나온 올렉 코줴먀코 연해주 주지사 등과 만나 “수년간 러시아 방문을 꿈꿔 왔다”며 “내가 북한을 이끈 지 7년이 지났는데, 이제서야 러시아에 오게 됐다”고 말했다.
하산역 도착 직후 김 위원장은 현장에 대기하고 있던 러시아 국영TV 기자의 기습 인터뷰 요구에 흔쾌히 응했다. 김 위원장은 “러시아 인민들의 뜨거운 환대를 받으면서 이번 방문이 매우 유익하고 성공적인 방문이 되고, 러시아 인사들과의 만남에서 많은 문제에 대한 의견을 교환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최고지도자가 예정에 없던 외국 취재진의 질문에 거침없이 답변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김 위원장은 하산역에서 전통의상을 입은 러시아 여성들로부터 꽃다발과 쟁반에 담긴 빵과 소금을 선물받고 빵을 조금 떼어 먹었다. 귀한 손님에게 빵과 소금을 쟁반에 담아 건네는 것은 러시아의 관습이다. 이어 하산역 인근의 ‘러시아-조선(북한) 우호의 집’을 방문한 뒤 다시 열차에 올랐다.
최승욱 조민아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