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출연한) 영화 48편, 나이 45세. 영화 시작한 지 20년이 좀 넘었는데, 첫 주연을 맡게 된 라미란입니다.”
배우 라미란의 인사말이 끝나자 객석에선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영화 ‘걸캅스’(감독 정다원)를 언론에 첫 공개하는 시사회 자리에서였다. ‘친절한 금자씨’(2005)로 충무로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넘나들며 종횡무진 활약해 온 그가 상업영화의 주연을 꿰찬 건 처음이다.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라미란은 “처음엔 주인공을 맡는다는 게 너무 부담스러웠다”고 털어놨다. “아무래도 흥행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잖아요. 내 티켓파워는 얼마나 될까 걱정도 되고…. 지금은 다 내려놨어요. 개봉이 임박해오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네요(웃음).”
‘걸캅스’가 더욱 주목되는 이유는 흔치 않은 여성 형사 버디물이어서다. 남성 배우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형사 캐릭터를 여성 배우들이 소화해낸 것만으로 영화에는 신선함이 덧입혀졌다. 더구나 40대 중반의 ‘아줌마’ 라미란이 펼쳐 보이는 강렬한 액션 연기는 너무도 인상적이다.
“갑자기 액션을 해야 한다니 정신이 없었어요. ‘할 수 있는 만큼만 보여주자’ 생각했죠. 날래지 않은 몸놀림이 오히려 새롭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었어요(웃음). 촬영 전 한 달 반 동안 레슬링과 복싱 트레이닝을 받았어요. 초반엔 다칠까봐 겁을 먹었는데, 하다 보니 묘한 쾌감이 있더라고요.”
영화는 클럽에서 벌어진 신종 마약 성범죄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비공식 수사에 나선 두 여성 형사의 이야기. 4년 전 기획된 작품인데, 소재가 기막히게 시의적절하다. 마약을 이용한 성범죄나 몰래카메라 불법 촬영 및 유포 등 최근 뉴스에서 익히 보고 듣던 내용들이 짜맞춘 듯 등장한다.
라미란은 “후반작업이 한창일 때 몰카 범죄에 관한 보도들을 접했다. ‘우리 얘기인데? 너무 똑같다’고 놀라워했다”면서 “현실과의 싱크로율이 높은 게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범죄에 대해 인식하는 건 좋은 현상이라 생각한다”고 얘기했다.
극 중 라미란이 연기한 미영은 여자 형사 기동대에서 에이스로 맹활약하던 전설의 형사. 지금은 결혼과 출산, 육아 등 현실의 벽에 부딪혀 경찰서 민원실 주무관으로 일한다. 우연히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를 만나게 된 그는 시누이인 강력반 형사 지혜(이성경)와 함께 사건에 뛰어든다.
투톱 주연으로 나선 라미란과 이성경은 남성 배우 못지않은 카리스마로 스크린을 휘어잡는다. 묵직한 주먹 한방이나 강력한 발차기로 상대를 제압한다. 해커 뺨치는 실력을 지닌 민원실 주무관 역의 최수영이 브레인 역할을 하는데, 셋이 이루는 코믹 앙상블이 극에 유쾌한 활력을 불어넣는다.
캐스팅과 내용을 놓고 페미니즘 영화라며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일부 여론도 있다. 라미란은 “애초에 젠더 이슈를 염두에 두고 만든 영화가 아니다”라며 “사건을 해결하는 주체가 여성일 뿐, 남성 주연의 영화들과 다를 게 없다”고 했다.
연극 무대를 누비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TV와 영화로 넘어왔다. ‘응답하라 1988’(tvN·2015) 등에서 보여준 특유의 친근함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이제 그를 롤모델로 꼽는 후배도 적지 않다. 라미란은 “책임감이 커진다. 내가 잘해야 다음 사람이 더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어쩌다 보니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대중적으로 알려진 사람이 됐어요. 원래 제 꿈은 그림자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오래 연기하는 거였거든요. 너무 도드라지면 정 맞기 쉬우니까요(웃음). 지금도 너무 과분한데, 앞으로 더 과분할 일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