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인 6·25전쟁은 의외로 한국 미술 작가들이 외면해온 주제였다. 김환기 이응로 김원 등이 피난민을 그린 것이 사례로 언급되는 정도다.
이런 상황이니 민중미술 작가 신학철(76)씨가 6·25전쟁을 소환한 것은 의미가 크다. 서울 종로구 효자로 인디프레스 갤러리에서 열리는 ‘신학철-한국현대사 625’전(6월 6일까지)에는 유화 12점, 콜라주 9점 등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역사화 신작이 나왔다.
신학철은 통일에 대한 염원을 이발소 그림 같은 농촌 풍경을 통해 은유한 ‘모내기’(1987년 작)가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로 판결이 나면서 고초를 겪었다. 1980년대 민중미술의 시대는 저물었지만 한결같이 5·18광주민주화운동에서 세월호 참사라는 시대의 상처를 극명히 보여주는 사건들을 작품 소재로 끌어안으며 소처럼 뚜벅뚜벅 걸어온 작가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지금 이 시점에 캔버스에 담는 건 생뚱맞아 보였다. 궁금함을 안고 전시가 열리는 인디프레스에서 최근 작가를 만났다.
“이제, 보내 드려야 할 때인 거 같아요. 그들에게 덧씌워진 ‘빨갱이’ 한을 풀어드려야지요.”
은퇴한 시골 교장 선생님 같은 수더분한 차림새의 그가 말했다. 그러면서 ‘6·25 이태골의 총살형’ 작품 속 소녀를 가리켰다. 가장의 주검을 두고 오열하는 아내와 두 딸이 있었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엉엉 울고 있는 작은 딸이 작가의 친구, 금자였다.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해 인공 치하에서 살아야 했는데, 포수였기에 떠밀리듯 ‘완장’을 찼던 금자의 아버지는 부역했다는 이유로 국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한국전쟁 당시 거창 화순 고창 등 곳곳에서 양민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작가의 고향 경북 김천에서도 그런 억울한 죽음이 있었던 것이다. 콩 볶는 듯 기관총 소리가 매일 들리던 때의 공포를 기억하는 전쟁세대. 그에게 한국전쟁은 가슴에 얹힌 돌멩이 같은 것이었다.
6·25전쟁 연작은 전쟁의 희생자들과 피난민들의 형상을 굽이굽이 휘감아 승천시키는 구도의 흑백 역사화다. 캄캄한 배경 속에 크고 작은 사람들이 뒤엉켜 연기처럼 하늘로 올라가는 이런 구도를 두고 미술평론가 심광현씨는 ‘애도를 위한 형식’이라고 평했다. 작품 속 이미지들은 신문 잡지 등에서 오린 것을 참고했다. 사진을 오려서 붙이는 ‘사진 콜라주’가 작가의 브랜드다. 데생 실력이라면 이미 중학교 때 인정받은 그였다. 공부엔 취미가 없어 중학교를 졸업한 뒤 소나 키우며 살려는 그를 본 사촌 형님이 말했다. “외동아들을 저리 둬서 되겠는교.” 그러더니 그가 명화를 베껴 그린 그림 몇 장을 들고 가 상고 특기생으로 턱하니 입학시켰다. 이후 홍익대 서양화과를 마친 그는 어느 날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사진이 그림보다 더 생생하게 말을 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사진 콜라주는 그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사진은 한계가 있었다. 원하는 크기대로 커졌다 작아졌다 하지 않았다. 상상을 가미한 변형을 가하기도 힘들었다. 사진 콜라주를 다시 회화로 옮겨 그리는 이유다.
폭격으로 초토화된 시가지, 집단 학살의 희생자처럼 보이는 무수한 주검, 혹한에 피난길에 나서 곧 얼어죽었을 것 같은 가족….
신 작가는 콜라주한 사진 이미지들을 캔버스에 차곡차곡 쌓아올리듯 그린다. 이것은 잊지 않겠다는 ‘기억의 행위’이다. 한을 풀기를 염원하는 ‘해원(解 )의 행위’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단순히 애도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거 그리기 전에는 억울하고 처참한 모습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리다 보니 태극기 집회하고 연결이 돼요. 해방 이후 친일에서 친미로 갈아탄 기득권 세력에게 등장한 새로운 무기가 6·25라는 거지요. 6·25가 반공 이데올로기를 극대화하는 핑계인 거지요. 기득권 세력은 색깔논쟁으로 지금도 권력을 유지하고 있어요.”
이런 역사관을 반영해 그의 6·25전쟁 연작의 또 다른 줄기는 전쟁의 폐허 위에 보수의 이미지와 인물을 쌓아올리는 구조를 취한다. 이를테면 ‘한국현대사-질곡의 종말’에서는 무수한 희생자와 피난민 이미지를 밟고 이승만에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를 거쳐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등 역대 보수 정권 대통령 얼굴이 차곡차곡 포개 있다. 맨 위에는 홍준표 나경원 조갑제 지만원 등 수구 정치인과 보수 논객의 얼굴이 태극기 부대 깃발과 함께 켜켜이 쌓여 있다.
“이거야말로 ‘실명 오브제’이지요. 어떤 그림을 그리더라도 실명의 사진을 싣는 것만큼 강력한 메시지를 던질 수 없어요.”
어떤 우회도 없다. 거침없이 자신의 정치색을 드러내는 그는 자신의 미술철학을 이렇게 설명한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싸우는 게 민중미술입니다. 권력자들, 돈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서민들이 더 잘 사는 사회로 가야지요.”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