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터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파동, 뒤이어 실시된 대통령선거와 야당의 집권, 출구 전략으로서의 IT산업 육성 정책…. 대한민국의 20세기 말은 숨가쁘게 흘러갔다. ‘다이내믹 코리아’라는 슬로건이 무색하지 않게 대한민국은 다른 개발도상국가와 달리 위기에서 경탄할 만한 집중력을 발휘해 IMF를 조기졸업했다. 인터넷 인프라를 신속하게 구축했고, 코스닥의 신화를 연일 만들어내며(그 대부분은 거품으로 판명나긴 했지만) 새로운 전략 무기가 된 IT산업을 앞세워 권토중래의 저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가요계의 민낯 드러낸 편집음반 신드롬
이것은 마치 ‘위기는 기회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오래된 잠언을 극동아시아의 작은 나라가 시전해낸 것이었다. 삼성전자로 상징되는 반도체 업종과 현대자동차로 대표되는 자동차 산업이 수출 시장의 쌍두마차로 부상했다. SK텔레콤은 인터넷과 이동전화를 담당하는 유·무선 정보통신 산업의 내수시장을 막강한 캐시카우(Cash Cow·수익 창출원)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 역전극의 신화를 위해선 ‘노동시장의 유연화’라는 어둠이 한국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어야 했다. 소득은 양극화의 길로 들어섰고, 비정규직이 해를 거듭할수록 급증했으며, 완전고용의 신화는 완전히 무너져 예측 불가능성은 심화됐다. 김대중정부의 전략적 출구이기도 했던 신용카드 사업은 많은 서민을 신용불량자로 만들어놓았다. 청년실업의 어두운 그림자가 한반도를 서서히 잠식한 것도 이 시점부터였다.
결국 김대중정부 5년은 한편으로는 경제 위기 극복의 시간이면서, 동시에 한국의 경제 체제가 국제금융자본 체제로의 편입을 강요받은 시기였다. 대마불사(大馬不死)라던 말과 달리 거대 재벌 대우가 사라졌고 수많은 은행은 통폐합됐다.
이러한 전환기에서 음반 산업도 거대한 구조조정의 시험대에 올라섰다. 2000년의 온라인 P2P 사이트 소리바다 파문과 2001년의 편집음반 ‘연가’ 사건은 이 시기 한국 음반 산업의 현실을 요약하는 중요한 주제다. 연간 4000억원 내외의 영세한 시장에 불과했던 한국 음반 시장은 제대로 된 통계 수치가 하나도 존재하지 않던 주먹구구의 시장이었다. 하지만 카세트테이프와 LP, CD라는 저장 매체에 기반을 둔 시장은 밀리언셀러 신드롬에 힘입어 한탕 터트리기만 하면 한몫 잡을 수 있는 투기적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 휘발성 강한 매력조차 MP3라는 듣도 보도 못한 디지털 매체가 출현하면서 사라지게 된다. 온라인에는 불법적인 MP3가 범람했다. 컴퓨터만 있으면 누구든 음원을 공짜로 내려받을 수 있게 됐다.
사장실 책상에 컴퓨터 한 대 놓여 있지 않았던 구세대 음반사들은 영문도 모른 채 시장에서 퇴출됐다. 어떤 회사들은 코스닥 시장의 사냥감이 되기도 했다. 불법 다운로드 현상은 얼마든지 정책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IT산업이 고속 성장을 하기 위해선 희생이 필요했고, 음반 산업은 바로 전략적 선택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내수 시장의 몰락이 코너에 몰린 기획사들로 하여금 해외시장 진출로 눈을 돌리게 함으로써 K팝의 거대한 성과를 결과적으로 도출하게 되었으니, 세상일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같다. 소리바다 파문이 인프라의 격변을 대변하고 있다면, 편집음반 ‘연가’ 신드롬은 음반 산업 내부의 고질적인 한계를 드러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히트곡을 모은 편집음반은 음반 산업 시대 언제나 존재한 시장의 조용한 스테디셀러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연가’는 달랐다. 전혀 새로운 기획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는 20~40대 여성 수용자에게 거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기존 편집음반의 속성을 가장 정교하게 포착했기 때문이었다. ‘연가’는 허술한 트랙 없이 알토란같은 ‘러브 발라드’의 정수들을 과감한 투자로 한곳에 모은 데다, 파격적인 가격 설정이 이루어졌으며, 이 세대 여성 수용자에게 절대적인 지지(혹은 동정)를 받던 배우 이미연을 전면에 내세워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쳤다. 이 같은 전략 앞에서 다른 음반들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2001년 음반 제작사들은 신보가 아예 나가지 않는다고 연일 하소연했다. 대형 배급사들은 배급사대로 배급을 거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그 어떤 조치도 음반시장의 권력을 찬탈한 편집음반 시리즈 앞에선 무력했다. ‘오리지널리티의 공황’이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이 현상은 그러나 냉정하게 바라보자면 한국 음반 산업의 자업자득에 가깝다. 가요계는 급속하게 높아져 가고 있던, 단일 앨범의 종합적 완성도에 대한 대중의 기대 욕망에 부응하지 못했다. 이전의 리어카 불법 테이프의 히트곡 모음집이 단속의 철퇴를 맞고 사라지면서 생긴 바로 그 공백을 숱한 편집 음반들이 ‘합법적으로’ 메꾸었던 것이다.
편집음반의 대대적 성공 퍼레이드는 그간의 한국 음반 산업의 콘텐츠 제작 역량이 얼마나 허술했나를 단숨에 보여주었다. 즉, 앨범의 포맷으로 음반을 포장해 팔아 왔지만, 음원이라는 개념이 생겨나면서 결국 한두 곡의 히트곡 싱글에 의존해온 그간의 얄팍한 상술이 편집음반이라는 새로울 것도 없는 포맷 앞에서 단숨에 민낯을 드러낸 셈이었다.
새로운 시대를 알린 조용한 축포
2001년의 음반 판매 차트가 한국 대중음악의 몰락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김건모 신승훈 조성모 같은 90년대 가수들은 간신히 자기의 성채를 방어하는 데 급급했다. 그리고 신인과 인디 계열은 무참한 패배를 맛보았다. 흥행의 양극화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2001년의 놀라운 예외가 있으니, 신인 중 유일하게 음반 판매고 50만장을 넘긴 R&B 듀오 브라운아이즈였다. 이들의 성공이 놀라운 것은 이들이 브라운관 매체는 물론 라디오에도 출연하지 않은, 마치 80년대 중반 언더그라운드 진영에서나 가능했을 ‘얼굴 없는 가수’의 행보로 일관했다는 사실이다.
윤건과 나얼, 브라운아이즈를 이루는 만만찮은 내공을 지닌 젊은 두 인물은 ‘생짜 신인’은 아니었다. 윤건은 팀(TEAM)이라는 힙합 그룹의 리더로 데뷔했으나 활동이 지지부진했고 나얼은 시대를 앞서갔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역시 대중적 반향은 불러일으키지 못한 아카펠라 그룹 앤섬의 일원이었다. 각각의 팀에서 야망을 실현하지 못한 두 사람이 만났던 것이다.
이들은 단숨에 불확실성의 시대에 표류하는 이 땅의 10대와 20대 젊은이들의 감수성을 저격하는 노래들을 만들었다. 그것은 황폐하게 무너진 시장의 비극을 뚫고 정상에 등극했고, 이들의 첫 성공작은 한국 스타일의 현대적 R&B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이정표가 됐다.
‘벌써 일년’에 담긴 내용은 지극히 평범하다. 이 노래의 묘미는 정교하게 설정된 유려한 그루브와 상처 입은 젊음을 표현하는,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보컬 하모니에 있다. 60년대 미8군 무대에서부터 한국 흑인음악의 계보학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주로 유색인 병사들을 위한 사병 클럽 무대에 솔이 도입되었으며, 이들은 당연히도 그들의 상관이었던 백인들의 음악에 비하면 언제나 ‘마이너’였다. 박인수와 김추자 같은 한국 R&B의 초기 영웅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서구풍 한국 대중음악의 주력은 언제나 스탠더드 팝에 기초한 발라드가 권좌를 독점했다. 음악인들 사이에서도 흑인 스타일의 음악을 ‘삼표음악’(아마 삼표 연탄에서 연유한 듯하다)으로 장난스럽게 불렀으니 그 위상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
서태지와 아이들과 듀스가 힙합의 시대를 열었지만 힙합과 레게 같은 음악 또한 백인화가 된 것이거나, 록 혹은 뉴웨이브 계열 장르와의 혼합을 통해 ‘한국형 힙합’이 수립되었음을 또한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더 이상 남부 미국의 사운드가 아닌 고도로 도시화된 세련된 흑인음악이 세계 음반 시장에서 전통적으로 정상의 지위를 누려왔던 록을 밀어내면서 흑인음악은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우리는 이런 스타일의 음악을 ‘어반(Urban)’이라고 부른다.
브라운아이즈의 ‘벌써 일년’과 이 곡이 담긴 앨범은 어반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조용한 축포였다. 더 이상 인종차별 같은 사회적 이슈에 분노를 표방하지도 않으며, 오로지 정제되고 연마된 기교로 음악의 지배력을 획득하겠다는 예술적 자신감이 어반 스타일의 본령이다.
새로운 세기, 새로운 1000년의 첫 페이지에 한국 대중음악사는 어반의 정수를 담은 놀라운 역작을 선보였다. 역시 되는 것도 없지만 안 되는 것도 없는 다이내믹 코리아다. 그리고 한국 대중음악은 이제 더 멀리 더 높이 비상할 채비를 조용히 완수하고 있었다.
강헌<음악평론가>